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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항동에 생긴 내 방

내가 살던 집 시리즈. 열두 번째. 구로구 항동

by 조은미

우리의 가족사로 인해 자연스럽게 무신론자가 된 나와는 달리 동생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언니, 영어 듣기 테스트해 보는 건 어때?” 라며 캠퍼스에서 만난 미국인 기독 청년들의 모임에 나를 초대했다. 나는 계속 거절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한편 스스로 나의 영어 듣기 실력이 궁금하기도 해서 미국인 목사의 설교를 한번 들어보려 집회에 갔다. 그리고 마지막 날, 눈물을 쏟으며 그 공동체의 멤버가 되었다.


당시의 기독교는 지금과 사뭇 다른 시대감이 있었다. 나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미국인 목사의 한국인 비서가 되었다. 청년들이 점점 더 모여들고 업무도 함께 늘던 중, 매우 부유한 한 기독교인이 자신이 살던 집을 청년 선교사인 미국인 목사 가족에게 집과 사무실로 사용하라며 내어주었다. 렌트비는 형식적일 정도로 저렴했다. 그러나 구로구 항동의 그린빌라는 내가 출퇴근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목사님 내외는 함께 살며 일하는 것을 제안했고 엄마는 이 말을 전해 듣자마자 곧바로 허락했다. 그렇게 엄마와 동생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침대가 있는 사무실 겸 내 방이 생겼다.


나지막한 동산 이곳저곳에 그림처럼 지어진 그린빌라에서 2년 남짓 미국인 가족과 함께 살았다. 손님처럼, 직원처럼, 제자처럼, 가족처럼 살며 월급도 받았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대우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았고 또 자녀를 갖고 낳으며 키우는 하루하루를 함께 살며 보고 배웠다. 내가 경험한 정말 좋은 환경은 단지 집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도무지 닮고 싶은 사람이 없었는데, 그린빌라에서 그 이름처럼 싱그러운 새 마음이 생겼다. 나도 이들처럼 살고 싶었다. 돌아보니 그날들이 훗날 나와 남편이 세 아이들을 홈스쿨링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지 않았나 싶다. 한편 교회 업무를 하며 마주칠 때마다 나를 누나라고 부르던, 미국인 목사의 영어 설교를 한국어로 통역하던 이가 내 아이들의 아빠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때이기도 하다.


멀리 떠나 있는 첫째 딸, 둘째 딸과 달리 엄마에게는 늘 곁에 있는 말 많고 낙천적인 막내딸이 각별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엄마 편을 들다가, 때로는 매운 말도 가리지 않고 해대고 또 금방 돌아서서 히히덕 대는 막내와 엄마는 하얀 털북숭이 강아지와 함께 별일 없이 사는 듯했다.


뒤숭숭했던 1980년대, 청년 서넛만 모여도 사복 경찰들이 다가왔다. 대학생 선교를 하는 미국인 부부의 둘째 아이 출생 신고에 필요한 비자 연장은 거절되었고,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이유는 '청년 선동'. 느닷없이 찾아온 이 사건은 마치 정신적 부모를 잃은 것 같았다. 당시 원자력공학과 4학년이었던 남편은 남겨진 교회를 이끌었고, 그의 리더십 안에 청년들은 함께 교회의 향방을 모색했다. 어려움을 헤치며 때마다 지혜로운 결정을 하는 남편을 나는 존경했고 우리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친구들은 환호해 주었지만 그의 누나와 동갑인 나를 그의 가족들은 난감해했는데, 내 엄마는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다."라고만 하셨다.


남편은 졸업 후 1년 동안 더 사역하고 입대했다. 복무지가 육군 사관학교로 정해져서 나는 주말마다 그를 볼 수 있었다. 제대 후 그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 싶어 하셨고 곧 결혼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귀하게 대해주셨다. 아들이 군대 간 사이 변치 않았던 내 마음을 곱게 보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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