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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대신 손가락을 썰어버린 아내

하필 그 손가락이 왜

by Johnstory

아내가 이번 설에 고구마 전을 먹고 싶다고 했다.



설을 앞두고 여러 가지 종류의 전을 준비했더랬다. 그렇게나 많은 양을 준비하며, 또 고구마 전이 먹고 싶다고 그 딱딱한 고구마를 썰다 결국 일을 냈다. 대게 이 정도의 베인 상처면 나는 아주 난리가 났을 텐데 아내는 외마디 비명을 매우 낮은 데시벨로 내뱉고 흐르는 수돗물에 상처를 씻어냈다. 피가 쉴 새 없이 내렸다. 손과 팔목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며 아이들도 놀라고 나도 놀랬다. 다행히 근처에 계신 지인 분의 도움으로 응급처치를 하고 다시 고구마를 썰었고, 기어이 그전을 해냈다. 누구 원망도 못한다 했다. 자기가 먹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니. 근데 중요한 건 이거다. T발씨인 아내는 놀람에도 굴곡이 없다. 놀라운 일을 별것 아닌 일로 만들어버리는 재주는 부럽고 어떤 때는 존경스럽다.

어딘가에 묻혀있는 고구마 전, 그게 뭐라고 그렇게 먹고 싶었을까


매번 명절 때마다 아내는 외친다.



이번엔 음식 정말 조금만 할 거야!




그 거짓말을 10년째 반복 중이다. 외며느리로서의 숙명인지, 남편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기가 먹고 싶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대단하고 고맙다. 이런 자기의 생각들을 조곤조곤 잘 알려주면 좋으련만 속 깊은 아내는 입도 무겁다. 스스로는 모든 정리를 마치고 일을 저지른다. 2025년도 설명절의 메인은 갈비찜 20인분과 모둠전 한소쿠리. 친정과 시댁 식구 모임에서 나눠 먹을 음식이었다. 각자 역할을 나눠 준비해 올 메뉴가 겹치지 않게 사전에 조율해서 준비한다. 시댁은 매년 구정 이후 기제사가 있는터라 설은 가볍게(?) 보낸다. 그렇다. 누구에게 가벼운 것인지 모르겠다. 아내에겐 심리적으로 '명절'이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중압감이 있을 것이다. 티를 내지 않아도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심리적 부담을 쌓여가는 전과 갈비찜 저 밑으로 깔아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먹는 사람은 알길 없는 만드는 이의 심리적 육체적 노동의 흔적



이유야 어찌 됐건, 애매한 손가락에 깊게 파인 상처가 무색하게 아내는 결혼 10주년의 설명절도 잘 치러냈다.

외며느리로 평생 이렇게 혼자 명절 준비를 했을 칠순이 넘은 나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가 해냈던 시간들을 서른아홉의 아내가 뒤를 잇는다. 언젠가 우리의 명절도 맥도날드 치즈버거와 밀크쉐이크로 채워질 수 있는 날이 올까? 솥뚜껑에 삼겹살을 굽고 김치를 썰어 볶음밥을 해 먹는 '시간'에 의미를 더 부여할 수 있는 명절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내의 손가락은 점점 잘 아물고 있지만 그날의 기억은 나에게도, 아내에게도 패인만큼의 쓰린 상처로 남을 것이다. 비록 고구마 전을 그토록 원했던 자신의 소원을 풀었으나 애초에 '명절과 전'이라는 개연성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테니 말이다. 그래도 아내의 상처는 더디지만 잘 아물고 있다. 아픈 만큼 아프다고 티를 좀 내줬으면 좋겠는데 이는 어렵겠다 싶다. 두 아이의 자연분만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 아내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안으로 삼키는 여자였다. 그렇기에 13시간 이상의 분만 전 진통이 어느 정도인지 난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고구마 대신 손가락을 썰면 소리를 지르는 게 정상 아닌가.

대단하다 생각 들다가도 가끔 무서워지는 아내가 다치는 일 없는 2025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디어 와이프: 아프면 아프다고 티 좀 내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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