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투적인 독서를 즐겼다.
결혼 후, 첫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집 근처 도서관에 습관처럼 갈 수 있도록 하는데에 우선 난 아내가 동참해 주길 바랐다. 1천 권이 약간 못 미치는 책을 보유하고 활자중독인 것 마냥 병렬독서를 즐기던 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바로 구입했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중고책으로 되팔거나 혹은 계속해서 보유했다. 덩달아 책이 차지하는 공간들은 넓어졌고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기 전,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진행했다.
아이들이 크면서 읽고 싶어 하는 책들, 부모로서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 책들을 빌렸다.
한 사람당 10권씩을 2주간 빌릴 수 있는 근처의 도서관은 우리 가족의 경우 2주간 40권을 빌려올 수가 있는 셈이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빌리고 반납하는 것이 매우 귀찮아질 수 있고, 어제오늘처럼 체감온도가 영하 15도에 육박하는 날 예약도서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일은 많은 고민을 하게 한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우리 식구들은 책의 구입 없이 빌리고 싶은 책들을 바로 가서 보거나, 빌리거나, 예약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더불어 나에게 남아있던 350여 권의 책들도 80권 수준으로 줄이고 방의 공간을 확보했다. 최종목표는 10권 이하로 보유도서를 줄이는 것인데, 선정작업이 쉽지 않다. 계속해서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책을 남겨야 하는데 아직은 '소유'에 대한 욕심을 극단적인 수준(나에겐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으로 줄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내는 오늘 예약된 도서를 빌리러 가야 한다고 했다.
다음 주부터 날씨가 좀 풀린다고 하는데, 꼭 오늘 가야 만 하냐고 묻는 나에게 오늘까지 예약도서를 찾아야 한다, 고 했다. 중요한 책인가. 아이들이 보고 싶어 했던 책이라 했다. 그것으로 아빠가 움직여야 할 명분은 충분하다. 그래, 날도 춥고 들어오는 길에 순댓국 두 그릇 포장해 와서 점심으로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도 좀 사고.
집 인근에는 두 군데의 도서관이 있다. 집 길건너편에 있는 도서관과 지하철 역 하나를 걸어가야 있는 오래된 시립도서관이다. 양쪽이 보유하고 있는 도서가 조금씩 다르고 환경이 달라서 두 곳 모두 이용한다. 또 스마트 도서관(무인으로 원하는 책을 바로 빌릴 수 있는 외부의 도서관, 버스 정류장에도 있고 도서관 외부에 별도의 부스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은 매우 실용적인데 비해 아직 사람들이 잘 활용하지 않는 것 같아 내겐 꿀 같은 공간이다. 덕분에 그간 보고 싶었던 책 4권을 빌려왔다. 아내와 난 각각 에코백과 장바구니에 책을 한가득 담아왔다. 날이 좋았어도 책 무게 때문에 마을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아이들이 즐겨있는 책은 대부분 다양한 종류의 만화로 된 교육용 책들이다. 4학년이 된 첫째는 가끔 내가 읽는 책도 가져가서 읽는다.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로마신화 완역본 같은 것들 말이다. 아직은 아이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책들로 한정되어 있지만 '읽는다'는 행위에 가장 큰 일조를 하는 아내는 조금씩 빌리는 책에 변화를 준다.
아이들이 즐겨보는 시리즈 물의 만화 위주의 책과 텍스트 위주의 책을 섞어 빌린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것에 대한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얘기들을 해준다. 첫째는 이에 반응한다. 책에 금방 빠져들고 밥 먹으면서도 책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많이 타박도 받지만 부모 된 입장에서 마음은 흐뭇하다. 읽는 행위에 우호적이며 개방적인 아이는, 국어 문제집에 있는 지문을 자주 읽는다. 오늘 아침에도 공부를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지난주에 풀었던 문제집에 있는 긴 지문들을 다시 읽고 있었다.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다고 했다. 놀라웠다.
공부에 관련된 텍스트와 독서를 위한 텍스트는 별개라 생각하고 자란 나로선 놀라울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나보다도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읽는 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2주의 간격으로, 가끔 연장하는 경우 3주의 간격으로 책을 반납하고 다시 빌리고 또 빠르게 읽은 책들은 미리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리는 이 행위를 꾸준히 하지 못할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지금 시기에 읽고 싶어 하는 책들은 소장의 가치가 있는 양서가 아닌, 일시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책들이기에 구입은 지양하고 지금처럼 주기적으로 빌려와서 읽는 것이 합리적이라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에 재미를 붙인 아내는 덩달아 스스로 읽고 싶은 책들도 늘어났다. 대부분이 자녀교육과 관련된 도서이고 종종 건강에 대한 책들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읽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책도 빌려온다. 가족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어떤 날은 30권 이상의 책을 빌려오기도 한다. 가끔 도서관에 가면 쇼핑용 캐리어에 책을 가득 담아 오는 부모들을 만난다. 우리와 다를 바 없을 그들의 부지런함을 생각하면 왠지 모를 따뜻함이 퍼진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아내는 아이들에게 말없이 알려준다.
기한 내에 독서를 마치는 것, 다음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스스로 책을 찾게 하는 것, 읽는 동안 몰입하는 것, 빌리고 반납하는 행위의 지속을 통한 부지런함 같은 것들을 말이다.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책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들도 이제는 학교 도서관, 길 건너 도서관, 아파트 단지 내 도서관 모든 곳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구매의 욕심을 달랜다. 첫째가 읽으니 둘째도 따라 읽는다. 거실에서 한 명이 읽기 시작하면 한 명이 따라 읽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거실에 모여 각자 자리에서 책을 읽는다. 한번 더 보고 싶은 책은 반납 전 다시 들춰본다. 그렇게 활자에 빠져들면 자연스럽게 재독을 마칠 수 있다. 일련의 흐름과 과정들이 두 아이의 마음과 사고의 풍요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아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이 비단 책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