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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해부 : 사랑, 사람

숙성이 되어 더욱 진득해진 관계 속 사랑의 그리움

by 이가은

사랑이란 오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달력의 종이가 수십 번 떼어지고 난 후, 사랑은 한 방향일 수도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가 결혼한 나이,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 아빠가 가족이 보고픈 마음을 숨기고 회사에서 야근을 한 나이 그리고 그 나이가 된 지금의 나. 그제야 모든 사랑을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해는 나를 더 아프게 했고, 온전한 이해로 완성시킨 사랑들은 또 다른 향수를 불러와 나를 울게 했다.

내가 태어난 날, 대가족이 기뻐했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할머니, 이모 그리고 삼촌이 입이 닳도록 하는 말.
'우리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니?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말이야.'
이 문장을 잇는 말들은 어린 시절 나를 먹이고 키운 그들의 과거 회상이었다. 아주 갓난아기 시절까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랑들이 너무나 커다랗고 귀한 것이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작은 이모가 스물한 살쯤, 친구들과 가는 놀이공원에 겨우 세 살이 된 나를 안고 갔다. 작은 이모와 엄마는 열 살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에 그 당시 이모는 이제 겨우 어른이 된 나이였던 것이다. 몇 해가 지나, 유치원을 가기 시작한 나는 여름마다 할머니집에서 살았다. 작은 이모와 큰 이모는 평소 출근을 하는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 나의 아침을 만들어주곤 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피곤한 기색은커녕 나를 보자마자 안아주며 볼 구석구석 입맞춤을 했다. 겨울이 되면 내가 감기가 걸릴까 노심초사하며, 뜨거운 물을 담아놓은 추운 욕실에서 따뜻하게 목욕을 시켜주었다. 이모가 벗어놓은 구두를 신고 어른 놀이를 할 때마다, 오히려 나의 놀이에 합을 맞춰주었다. 겨울이 찾아온 할머니 집에서, 전기장판 가장 가운데. 가장 따뜻한 곳이 나의 차지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당연할 만큼 자연스러운 것들이었다.

가족들이 나를 온 마음을 다 해 사랑한 시간들이 지나, 나는 그들의 나이가 되었다. 나는 그들이 준 사랑만큼 그들에게 사랑을 채워주고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준 것들이 없어 늘 미안해하는 나에게, 이미 충분히 받고 있다며 손을 잡아준다.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곳. 그곳에서 시작된 사랑이 담긴 공기들은 저 멀리 어딘가에 닿아 내가 가는 곳마다 외롭지 않도록 해주었다. 고향을 떠나오면 어디가 되었든 우리는 익숙했던 것들을 찾게 된다. 그러다 그리움을 느끼고 마지못해 '향수병'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귀찮으리만큼 당연했던 사랑들을 다시금 찾아 나서기 위해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다. 그러다 종국에 우리는 깨닫고 만다. 새로운 인연과 만들어낸 그릇에 담을 사랑을 키워나가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사랑은 와인과도 같아서 오랫동안 숙성을 시키면 더욱 향과 맛이 진해진다. 옅었던 사랑의 색깔까지도 진해진다. 이런 사랑의 이론을 잘 알고 있음에도 결국 숙성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인연들의 관계가 끊어져버린다.

정착할 곳이 아닌, 언제든 떠날 곳에서는 더욱 인연들을 찾기가 힘들다. 언제든 돌아갈 곳인 나의 고향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고향을 떠나온 이곳에서는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 시간이 흘러가며 만나는 사람들, 동료, 새로운 친구들이 인연의 시작이 된다. 지금까지 나의 인연들은 불안정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가 1년이 지난 후 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언제든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이별에 나는 이곳에서의 삶이 삭막하게만 느껴졌다. 또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은 진정성이 없었다. '결'이 맞지 않거나, 대화의 주제나 흐름이 매끄럽게 오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고 짧은 만남이 만들어낸 단순한 이별이 되었다. 아주 가끔 한국 사람들과 일을 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직장에서 알게 된 인연이 친구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점점 더 한국을 자주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건 한국이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애쓰지 않아도 나를 잘 아는 사람들. 머리를 이틀째 감지 않아도 머리 냄새가 좋다며 다가와주는 우리 집 강아지. 재잘대는 나를 재미있어하는 남자친구. 나 조차도 챙기지 않는 끼니들을 더 걱정하는 엄마 아빠. 나는 그들과 그들이 주는 사랑이 그리웠던 것이다.

깊이 숙성된 사랑의 힘은 강력하다. 그 힘은 스무 살이 된 첫 해의 시작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외 생활을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이었고, 아주 가끔은 강력함의 오류로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7년의 세월이 흐르며 지나갈 줄로만 알았던 인연들의 사랑이 깊게 숙성되어 또 다른 '사랑 향수'를 만들어냈다. 가장 오랜 기간 숙성된 사랑을 해부하다 보면, 새로운 인연들과 만들어 낼 사랑의 숙성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익숙했던 모든 오래된 것들은 결국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사랑.
그리고 사람.
새로운 인연들과 만들어낼 또 다른 사랑들과
그것들이 새롭게 창조할 추억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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