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 금 : 국학기공, 장대콩국수, 그리고 마니또 들킨 날.
나와 룸메는 생활방식이나 성격이 다행을 넘어서 말이 안 될 수준으로 잘 맞아서 함께 이곳저곳을 잘 다니는 편이다. 이번에는 둘 이선 오전 6시에 순천시에서 무료로 진행하는 '해달맞이 생활체육교실'에서 국학기공을 해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조례호수공원으로 향했다.(참고로 순천의 공유 자전거인 '온누리 자전거'는 3000원짜리 한 달권을 사면 무제한으로 한 달 동안 추가금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숙소에서 조례호수공원까지 자전거로 25분 정도 걸리지만 중간중간 고르지 못한 길들이 많은 편이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편이라 쉽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처음 온누리 자전거를 이용해 보는 거라 대여할 때 생각보다 버벅거렸던 것도 있었다. 그래서 도착하니 이미 30분 정도 늦은 상태였고, 우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국학기공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국학기공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카메라를 놓은 삼각대를 치울 때까지 기다리다가 오셔서 말을 건네셨다. 이것저것 묻는 선생님의 음성에서 반가움과 신기함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순천에서 생활을 되돌아보았을 때 나는 도시에서와 달리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반가운 존재였던 거 같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없으니까 그런 거겠지. 나는 도시에선 어딜 가나 방해물과 같은 존재였다. 만원 지하철을 더 붐비게 만드는 행인 중 한 명이었고, 좁은 인도 위 바글바글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뭘 하든, 뭘 하지 않든 그건 아무 상관없었다. 도시는 언제나 호의 보단 불의를, 반가움보단 짜증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순수한 반가움이 잔뜩 묻은 말과 눈빛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반가운 존재구나, 이곳, 순천에서는.
호수공원이 너무 아름다워서 국학기공만 하고 나서 바로 가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우린 한 바퀴를 돌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까지 뻥 뚫린 곳이 있었다니. 국학기공을 하러 오지 않았다면 분명 못 봤을 풍경이었을 거다. 한 바퀴를 돌면서 강아지 산책을 하는 사람과 러닝 하는 사람 등 동네 주민들도 여럿 마주치고, 어디서도 못 봐왔던 귀여운 새도 가까이서 보았다. 길가에서 사람구경하며 식빵 굽는 고양이도 보고선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조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이상한 샛길로 빠졌는데 그 내리막길의 아름다움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곳을 찾아가 볼 생각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다 같이 '장대콩국수'로 이동했다. 콩국수가 8000원임에도 불구하고 세숫대야에 나와서 다 먹은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 양에 이 가격이라니, 심지어 이 걸쭉한 국물이라니. 양이 너무 많아서 이곳을 올 때엔 텀블러를 가져와서 남은 콩물을 담아 가져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제 순천이 아닌 다른 곳에선 음식을 못 사 먹을 거 같다. 콩국수를 든든히 먹고서 나와 룸메는 우리 숙소를 꾸미기 시작했다. 순천의 마스코트인 흑두루미와 짱뚱어 그림을 그려서 벽에 붙이고 나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방 언니들이 우리 방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숙소에 카드 키를 놓고 와서 방에 들어갈 수 없었던 환희언니를 필두로 그런 언니를 찾아 지원언니와 혜진언니가 이 방으로 왔고, 그렇게 모두 모이게 됐다.
이날 그린 그림 속 글씨체가 내 마니또에게 준 편지 속 글씨체랑 똑같아서 딱 걸려 버렸다. 그렇게 총 9명이 하고 있는 마니또에서 내 마니또를 포함, 6명에게 들켜버렸다. 하필 내가 이걸 붙인 그날 언니들이 우리 방에 놀러 오는 바람에.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그리고 방심은 금물이다. 나는 당황하면 무언가를 계속 먹는다는 걸 이날 알았다. 매우 당황한 나는 내 마니또가 준 초콜릿 한 통을 거의 다 비우고, 냉장고에 뒹굴러 다니던 페레로로쉐도 2개나 까먹었다. 이렇게 나를 더 알아갈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렇게 멘털이 탈탈 털린 채로 내 룸메와 함께 중앙동으로 산책을 나갔다. 다시 정리하면서 보니 우리 두 명이 정말 징글징글하게 붙어 다녔다 싶다.
털린 멘탈을 겨우 수습하고, '오운커피하우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해야 할 일을 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핸드 드립 카페였는데 분위기가 괜찮았다. 한 시간 반 타이머를 맞추어 놓고 나와 룸메는 아무 말 없이 할 일에 몰입했다. 그러고 나니 벌써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런데 순천은 보통 오후 6시만 되면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아서 우리가 가려던 소품샵들은 가지 못했다. 하지만 길 자체가 너무 예뻐서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만 다녀도,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순천은 지붕들이 다 낮아서 키가 작은 내가 올려보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지도앱을 끄고 작다란 골목골목 사이로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길을 걷다가 순천에서 유명한 디저트집인 '달노루 과자점'을 우연히 발견했다. 나는 마니또도 다 들켜버렸기에 오히려 잘 되었다 싶어서 내 마니또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디저트가 좋냐고 물어보고선 그 디저트를 샀다. 내 마니또인 다혜언니는 치즈케이크보단 레몬케이크를 더 좋아했다. 낮에 마니또를 들켰을 땐 내가 너무 한심했는데 달리 생각해 보니 마니또 취향에 딱 맞는 선물을 해 줄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좋은 면도 있었다. 이러려고 들킨 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심란했던 마음은 모두 추스러졌다.
계속 고기를 먹어와서 오늘은 둘 다 야채를 먹고 싶어 했다. 그래서 '순리당'에서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포장해서 숙소에서 함께 먹었다. 후식으론 달노루 과자점에서 산 크림브릴레 치즈케이크와 에그타르트를 반 씩 나누어 먹었는데 둘 다 다른 느낌으로 맛있었다. 다음 날에 레몬케이크도 먹어보았는데 치즈케이크와 에그타르트의 맛을 따라오지 못했다. 디저트에서 풍기는 버터향이 좋았고, 적당히 달아서 이곳에 한 번 더 방문해보고 싶어졌다.
아침에 길을 헤매느라 국학기공 체조 프로그램에 30분이나 지각하기도 했고, 중간에 마니또를 걸려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도 했으며 원래 가려던 소품샵도 가지 못했다. 결국, 오늘 계획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 30분이 우리에겐 딱 알맞았고, 마니또를 들켜서 취향에 맞는 선물을 줄 수 있었고, 원래 가려던 소품샵 대신 길을 걷다가 맛있는 디저트집과 예쁜 골목골목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그건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는 거 같다고, 나는 오늘 하루는 계획이 틀어져서 더 좋은 날이었다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