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잔디와 풀이 돋아난 운동장을 마주했다. 써니가 신이 났다. 이렇게 넓은 공터가 캠핑장 안에 있다니. 차가 다니는 길과도 조금 떨어져 있다. 모래도 적당히 섞여 있어 뛰어놀기 딱 좋아 보였다. 이번 캠핑은 시작과 동시에 써니와 마음껏 뛰놀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내 마음은 한 껏 부풀었다.
이내 써니는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양 팔을 벌리고 뒤를 따랐다. 볼에 닿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아빠는 비행기 팔 하고 달릴 거야~"
"난 비행기 팔 필요 없어. 난 이렇게 달리는 거야~"
순간 나는 외쳤다.
"써니! 조심조심."
펼쳐진 들판을 마음껏 달리는 지금이 좋았음에도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외마디.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때는 늦었다. 써니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몇 초 간의 적막. 나는 민망했고 써니는 당황했다. 순간 상황을 모면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써니, 아빠 목소리가 너무 컸지. 미안~"
"........"
"너 신발이 샌들이라 넘어질까 봐 아빠가 그랬어."
"........"
"써니, 거기 서서 브이(V)해봐. 사진 찍어줄게."
"........"
"써니, 조심조심" 나는 외쳤다. 써니는 그자리에서 얼어버렸다. 나는 민망했고 써니는 당황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끼어든다.
"뭘 맨날 조심해. 당신이나 조심해. 쓸데없는 짓하다 걸리면 정말 죽는다."
"내가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그래~"
"뭘 맨날 조심조심이야. 여기 뭐가 있는데~"
"넘어질까 봐 그러지~"
"됐고, 가서 물이나 사와. 써니, 엄마랑 저기 가서 놀자."
써니는 풀이 죽었고 더 이상 뛰지 않았다.
이런 나의 '조심조심'병은 사실 발병 원인이 있다. 써니가 걷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치과 진료를 받으러 갔던 병원에서 그만 뜨거운 물컵을 앞가슴에 뒤집어쓰는 사고를 입었었다. 누군가가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 마실 요량으로 뜨거운 물을 담아 테이블 모서리에 놓아둔 것을 써니가 잡아당긴 것이다.
병원과는 다툼이 벌어졌다. 나의 눈에 병원은 위험천만한 요소들이 즐비했다. 병원장은 어린이 환자를 주로 받는 치과라 모든 부분에서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뜨거운 물에 유아 화상 사고가 발생했지만 책임지는 어른은 아무도 없는 상황.
"안전관리 책임은 병원 측에서 전적으로 지셔야 하는 것 안닌가요?"
"아니 의사가 진료는 안 하고 애들 뭐하는지 일일이 따라다니라는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사고가 발생한 장소에 대한 책임은 병원에 있다는 겁니다."
"아버님 공무원이시라면서요~ 왜 그러세요. 저희가 뭘 잘못했는지 정확히 말씀해 보세요."
젠장, 공무원이 왜 거기서 나오는지. 나는 더 이상 다툼을 이어 가지 못했다. 무엇인가를 요구하고자 그런 것은 아니다. 책임을 지우고 싶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왔지만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울분을 삭이며 병원 문을 나서는 데 한편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아빠의 눈은 항상 아이에게'
그랬다. 결국 아이에게서 시선을 놓아 버린 부모의 잘못이다. 사고로 놀란 마음과 분쟁에서 설득당했다는 울분이 뒤엉킨 상황에서 눈에 들어온 저 문구는 마음에 쓰였졌다.
환부는 넓었지만 다행히 깊지 않았다. 금세 새살이 돋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 흉터는 남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눈은 상항 아이에게' 문구는 내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됐다. 나의 '조심조심' 병은 그 후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부쩍 써니는 소소한 일에 참견하는 일이 많아졌다. 장난감 건전지를 교체하기 위해 드라이버를 손에 쥐면 어느 순간 써니가 옆에 와선 "아빠 나도 같이 할래"를 반복한다. 써니의 손에 쥐어 주고 함께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을 나는 "안돼, 위험해. 아빠가 할게"라고 한다.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깨어진 낡은 드라이버를 써니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 나로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써니의 호기심은 늘어가기지만 나는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캠핑을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이런 이유들 때문인데~
나의 '조심조심' 외마디로 시작한 이번 캠핑 2박 3일. 함 숨 머금고 신나게 내달리다 아빠의 외침에 멈춰서 얼어버린 써니의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는 써니에게 더 다가갔고 함께하려 했다. 하지만 그 함께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의 반복이라는 것을 하나씩 깨닫기 시작했다.
해먹에 올라가려 애쓰는 써니가 보이자 목젖까지 '조심조심'이 올라왔지만 참아본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써니를 안아 올려 해먹에 태웠다. 그리고는 바로 후회했다.
"여기서 넘어져야 손바닥까지게 전부일 텐데 그새를 못참고 스스로 하려는 애를 막아서다니..."
나의 '조심조심' 외마디는 '멈춰'였고 나의 '같이 하자'는 '아빠가 할게'였다. 나는 캠핑 내내 겉돌았다.
나의 고민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한 동안 이어졌다.
다음 캠핑을 준비하던 중 문득 한 쇼핑몰에서 봤던 캠핑 장비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보고 어딘가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나는 각종 모바일 쇼핑몰을 뒤졌다. 로그인을 위해 아이디/비번 찾기의 수고스러움도 감내했다. 그리고 찾았다. 한쪽 모퉁이에 두개의 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곳을 발로 여러 차례 밟으면 공기가 채워지는 에어매트다. 접었을 때 작은 부피로 휴대하기 편할 것 같아 장바구니에 담아두기만 했던 평범한 에어매트가 갑자기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당신 또 뭐 샀어?"
"어, 자기 바닥 딱딱한 거 싫다고 해서 에어 매트 샀지. 당신을 위해~"
"고만 사라~"
"이제 살 거 없어. 마지막이야. 이제 다 샀어. 완벽해~"
"진짜 마지막이야~~"
"알써 알써~ 써니 이리로 나와봐. 아빠랑 이거 펼쳐보자."
"어~ 근데 그거 뭐야? 보라색이네."
"어~ 이거 캠핑 가서 우리 집에 깔건대, 여기 발 그림을 계속 밟으면 부풀어. 해보자."
"어떻게? 이렇게?"
"응응. 그렇게 계속해봐. 여기있는 발은 아빠가 할게."
"아~ 여보, 좁아죽겠는데 좀 치워. 밥 안 먹을 거야?"
써니와 나는 아내의 핀잔을 들은 채 만채 뒷전으로 하고 부산스럽게 발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 양 발을 이용해 펌프질을 하면 금방 공기를 가득 채울 수 있지만 써니의 작은 발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한참을 열중했다.
번갈아 발을 구르며 깔깔댔다.
매트는 쉽게 부풀지 않았지만 나는 한 껏 부풀었다. 써니와 '진짜 함께할 첫 캠핑'을 상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