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귀 앞에 선 슬픈 낙타

노는(遊)신부의 대림절 ‘함께 걷는 기다림’

by 교회사이


대림절 세 번째 주 화요일, 기다리며 읽는 마태복음서 (17)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 . 어느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그 젊은이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서 19:16-22)


슬픈 낙타 2.JPG photo by noneunshinboo


슬픈 부자 청년입니다.

부자라고 슬프지 않을 이유가 없고, 젊다고 슬프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부자 청년이 느끼는 그 슬픔은 다른 이들이 느끼는 슬픔과는 그 결을 달리합니다. 가난해서 슬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여서 슬픕니다. 정확히 말하면 부자인 것이 슬픈 게 아니라 부자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예수께서는 동시에 그럴 수는 없다,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가난해져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니 그것이 슬픈 것입니다.


이것도 소중해서 놓을 수 없고, 저것 역시 소중하니 놓칠 수 없습니다. 지금 손에 쥔 것을 내려놓자니 분명 내 것인데 너무 아깝고 또 내가 누리는 지금이 그리고 이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렇다고 저것을 포기할까요? 절대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습니다. 괜히 물어봤나? 후회가 막급이지만 늦었습니다. 이미 저분의 말씀을 들었으니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부자 청년은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뜩이나 가난이 슬픈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지금 이 부자 청년의 슬픔은 참 낯설고, 사실 그의 슬픔을 대놓고 얘기하는 게 조금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의 입장에서 지금 느끼는 슬픔도 분명 슬픔입니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게 어떻게 슬픔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한 번쯤 나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 그런 소망을 가져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그런 기도를 적어도 한 번은 하셨다면, 이 부자 청년이 느끼는 슬픔이 꼭 낯설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근심 어린 얼굴로,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떠나가는 부자 청년의 슬픈 뒷모습이 먀냥 남의 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 부자 청년 혼자만 느낄 수 있는 슬픔이 아니라, 적어도 한 번은 부자가 되는 꿈을 꾸어본 적이 있는 우리가 혹 미래에 갖게 될 수도 있는 고민과 슬픔

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슬플 땐 슬플 지언정 부자가 한 번 되어나 봤으면 . . .’ 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난 그런 경우가 혹시 되더라도 절대 슬퍼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아니 왜 슬퍼하겠어, 부자인데’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난 뭐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텐데 슬퍼할 일인가 그게?’ 하실 분도, 슬퍼한다는 그것이 오히려 슬프다 하실 분도 물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문제일까요, 이것을 놓고 저것을 잡고, 아니면 이것을 잡고 저것을 놓고? 그런데, 그 두 개를 다 잡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슬픈 낙타 3.JPG photo by noneunshinboo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 19:24)


그래도 한 번 해보자!

하지만, 아무리 넓히고 넓힌다고 해서 바늘귀가 어디까지 넓혀지겠으며, 아무리 다이어트를 시키고 또 시킨다고 해서 바늘귀만큼 작아질 낙타도 아닐 테고, 그게 가능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마 6:24)


그러니,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마 6:33)


부자 청년이 되고자 했던 그 ‘완전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 바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 부자 청년은 그래도 슬퍼할 줄을 아는 청년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 그 옳은 것과 그 옳은 길에 관심을 갖는 청년입니다. 옳은 질문을 옳은 스승에게 물을 줄 아는 지혜가 있는 청년입니다. 그리고 그 하신 말씀이 자기에게는 너무 가혹하다 싶지만 그렇다고 그 말씀이 전혀 틀렸다 생각하지 않는 청년입니다. 오히려 그 말씀이 옳다고, 그러나 기꺼이 따르기에는 참 어려운, 그래서 자기에게는 너무도 슬픈 말씀, 그래서 그런 자신을 슬퍼할 줄 아는 청년입니다.


아마도 이 부자 청년은 계속해서 속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이 계속해서 두고 두고 그의 가슴에 있을 것입니다. 불편하겠지요. 고민스러울 겁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 할 그 때가 이 청년에게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 청년의 슬픔과 고민은 깊어갈 것입니다.

혹시 그걸 이미 아셨기에 예수께서 이 청년을 눈여겨보셨고 또 사랑스럽게 여기셨지 않았을까요? (마가복음서 10:21)



겨울밤도 깊어 가고,

슬픈 부자 청년의 고민도 깊어 가고,

우리의 기다림도 깊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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