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버지의 그 딸들과 그 아들들

노는(遊)신부의 대림절 ‘함께 걷는 기다림’

by 교회사이


대림절 세 번째 주 토요일, 기다리며 읽는 마태복음서 (21)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마태복음서 23:8-12, 새번역)


한 아버지 2.jpg photo by noneunshinboo


캐나다 성공회 사제가 되고 난 후 첫 일요일입니다. 예배가 끝난 뒤, 커피 타임에도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합니다. 친한 한 교인이 저기 손을 흔들며 여기 저에게 다가옵니다.

“Father!”

저를 보고 손을 흔드는 줄 알고 저 역시 손을 흔들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저 친구 아버님께서 오셨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 거립니다. 그런 나를 보고 웃는 건지 아니면 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정말 저기 어디에 계신 자기 아버지를 보고 웃는 건지. 어느새 코 앞까지 온 그 친구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제 눈을 똑바로 보며 더 크게 부릅니다.

“Father!”

“Who? . . . Me?”

“Of course, You, Father!”

“. . . . . .”


앵글로 캐톨릭 전통에 가깝거나 혹은 그 호칭이 그냥 입에 배인 성공회 신자분들은 종종 사제(신부/목사)를 ‘father’ 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누가 사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었는데, 아마 이제 막 사제가 된 저를 조금은 가볍고 친근하게 축하하려는 생각에 그렇게 불렀던 모양입니다.

“Father!”

그래서 저는,

“Sorry, I am not your father. And I don’t want to be your father. I already have one, one is enough for me. No more, and no thanks.”


사실 진심이었습니다. 이미 있는 아들 하나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데, 그 하나 있는 아들에게 제대로 아빠하는 것도 어려운데, 이런 다 큰 아들 그것도 아빠 말 정~말 안 듣게 생긴 아들이 또 생긴다니, 정말 노 땡큐였습니다.




물론, 그 친구가 저를 ‘father’ 라고 부른 그 아버지가 그 아버지, 그 아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호칭 혹은 존중의 의미 정도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father’ 라는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제까지 ‘형제자매’ 혹은 ‘친구’였던 사이가 하루 아침에 ‘아버지’라고 부르고 불리는 사이가 된다는 것, 저에게는 무척 낯설었고 무엇보다 너무 무거웠습니다. 두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 알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리고 앞으로는 이 친구가 그리고 이분들이 나를 보는 눈이 나를 듣는 귀가 어제와는 달라지겠구나. 그렇게 불리는 것을 내가 불편해 할 수는 있어도, 이분들이 그렇게 나를 부르지 않아도, 그리고 내가 그렇게 불릴 만큼 되지 못하고 또 될 수 없다 해도, 많이 다르겠구나.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적어도 ‘나 지기 힘들다고 남의 어깨에 짐 지우고, 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말만 많고, 윗자리 높은 자리를 엿보고 탐하고 그 자리 옆에서 위에서 거들먹거리고, 당연하다는 듯 인사 받고 ‘랍비’ 소리 아무 감정없이 듣는’ (마 23:3-7), 지금 예수께서 꾸짖으시는 그 사람들처럼은 되지 말아야겠다, 그런 못난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


한 아버지 3.JPG photo by noneunshinboo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 사이에는 애정과 우정이 있는 만큼 싸움도 있고 다툼도 있고, 이기고 싶은 마음도 결코 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습니다. 때론 서운함을 넘어 미움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때론 남 보다 못한 오히려 원수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와 자식 사이가 어디 그런가요?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엄마 아빠가 자기 아들 딸과 뜀박질 해서 이겨 본들, 팔씨름해서 이겨 본들, 말싸움이든 감정싸움이든 그거 이겨 본들 그게 정말 이기는 것이며, 서운해 하고 미워해 한들 내 아들 내 딸 언제까지 어디까지 서운해 하고 미워 할 수 있겠습니까? 만나지 않는다고 그 딸이 그 아들이 어디 가겠습니까, 가슴 거기 더 깊이 박혀있겠지요, 아프고 저리게.


아버지와 아빠가 되는 것, 어머니와 엄마가 되는 것은 못난 나, 못된 나, 부족하고 없는 나, 아직 다 크지 못한 나를 거슬러 오르고 올라 사랑으로 다시 흐르고 사랑으로 다시 내리는 것입니다. 낮은 곳을 적시고 빈 웅덩이를 채우며 흘러 흘러 저기 바다까지, 그 큰 사랑까지, 저 크신 아버지의 그 사랑까지 가는 것입니다.




형제자매가 없는 제 아이에게 형제자매 같은 아빠가 되려고, 친구 같은 아빠가 되려고,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 만큼 또 아이에게 ‘아빠가 미안해’ 하는 소리도 자주 합니다.

그렇게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가는 중인 저는 하늘에 계신 한 분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이고, 지금 제 글을 읽고 계신 분들과 그 한 아버지를 둔 한 형제자매입니다. 또한 제 아이와도 한 아버지를 둔 한 형제자매입니다.



스승은 오직 한 분,

우리는 다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인도자는 오직 한 분,

우리는 다 그분을 따르는 양들입니다.

아버지는 오직 한 분,

우리는 다 그분의 자식들이고, 우리는 한 형제자매입니다.

그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 랍비(Rabbi). 스승을 일컫는 히브리 말의 그리스어 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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