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달빛이 교교한 밤, 광한루 누각의 그네에 춘향이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었다. 비단 치마 끝자락이 서늘한 밤공기에 젖어들었다. 내일이면 그녀는 이 고을, 남원 부사의 아내가 될 터였다. 나이는 찼어도 능력만큼은 출중한 사내라, 향단이마저 부러워하는 혼사였다. 상념에 잠긴 춘향의 등 뒤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몽룡 도령임을 알 수 있었다.
“먼 길, 평안히 다녀오셨는지요?”
“보시다시피 무탈하게 돌아왔소.”
춘향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달빛을 머금은 먼 산의 능선만 바라보았다.
“그 어여쁜 얼굴을 오늘은 정녕 아니 보여줄 셈이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영영 보지 못하실 겁니다.”
“그렇겠지. 이리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조차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쓸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춘향이 먼저 정적을 깼다.
“과거는 잘 치르셨습니까?”
“솔직히 고하면 이번에도 하늘의 뜻을 얻기는 어려울 듯하오.”
“도련님께서는 분명 장원 급제하실 겁니다. 저는 그리 믿습니다.”
“늘 나를 믿어주니, 매번 실망만 안기는 내가 더욱 부끄러워지는군.”
춘향이 애써 화제를 돌렸다.
“한양에는 도련님의 마음을 흔드는 어여쁜 여인은 없었는지요?”
그 말에 몽룡이 낮게 웃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우십니까?”
발끈한 춘향이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 속에 담긴 깊은 슬픔을 마주하자,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다시 급히 고개를 돌렸다. 몽룡이 말을 이었다.
“어여쁜 여인은 없었으나, 아주 기이한 사내를 만났소.”
“무슨 이야기가 그리 재미있었길래요.”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더군. 그곳에는 신분도, 가문도, 심지어 이 지긋지긋한 과거 시험도 없어, 사내와 여인이 그저 마음만으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하였소.”
“허언도 그런 허언이 없사옵니다.”
춘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붙잡아서는 아니 될 헛된 망상. 그러나 그 허언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혀와, 애써 단단히 굳혔던 마음을 흔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몽룡이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신분도, 가문도 없는 세상이라.”
춘향도 그를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차갑고도 영롱한 달빛 아래, 그들은 신분도, 가문도, 헛된 공명도 없는 먼 미래의 어느 밤을 함께 꿈꾸었다.
“춘향아.”
몽룡의 목소리가 달빛에 비친 호수처럼 떨려왔다.
“우리, 부디 먼 미래에 다시 만나 원 없이 사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