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선 심심할 틈이 없다.
아니, 신나는 놀이가 한가득이다.
나의 24시간은 모두 '놀이'로 채워져 있다.
하루 10여시간 책상앞에서 책과 글이랑 놀고
집안일은 뭐, 이건 일도 놀이도 아닌, 그냥 먹고 자는 것처럼 습관화된 것들이니 빼고
나머지 시간은 온통 나의 놀이터에서 나만의 놀이를 만들어가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
오늘은 마당왼쪽 작은 언덕에 오르기로 했다.
이유는 단풍나무때문이다.
가을의 끄트머리, 자기 손바닥을 있는 힘껏 펴며 서로 경쟁하듯 빠알갛게 스스로를 물들여가는 단풍을 보는 내내 내 마음은 환해졌다. 빨간색도 주황색도 노랑색도 아닌, 하나하나가 다 색이 다르다. 인간의 언어와 개념으로 지금껏 명명하지 못한 다채로운 컬러들이 함께 자기만의 색들을 경쟁하듯, 하지만 조화안에서 드러내려 애쓰는 모습이 다양한 인간군상 속에서 '나다운 삶'을 살겠다고 이리 용쓰는 나와 닮은 것도 같고. '인간'으로 다 비슷비슷한 삶인데도 그 거대한 조화속에 자신의 독창성을 찾으려 애쓰는 것도 같고... 그 작은 수천개의 손바닥이 모여 언덕 전체를 더 밝게 이끄는 기운에 놀라기도 했고...
나는 진작에 욕심이 났다.
우리집 마당에도 소담하고 빠알간 단풍나무를 심고 싶은 욕심.
커다란 단풍나무 아래로 가면 태어난 아가단풍들이 즐비하겠지? 싶어 올랐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쁜 단풍아가들이 얼마나 많이 싹을 틔웠던지. '이제 너희들은 독립할 때야. 엄마품을 떠나 우리집으로 이사가자.'하며 아직 깊이까지 뿌리를 내리지 않은, 하지만 너무 아가라서 옮기면 탈날 것 같은 녀석들 빼고, 그러니까... 어린이집갈 정도로만 키를 키운 녀석들 5뿌리를 캤다.
그리고 우리집 마당 오른쪽 끄트머리에 심기로 했다.
나무를 베어내는 바람에 집 마당위로 살짝 올라온 앞집 농막도 가릴 겸,
그 곳이 봄에는 벗꽃, 가을에는 단풍, 그리 나의 마당이 채색되기도 바라고.
연못의 모서리이니 2m정도 작은 키로 동그랗게 다듬어가며 키운다면 더할나위없이, 마땅히 여기가 애초부터 정해진 자기자리인듯 제법 근사할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오는 해를 가장 먼저 받는 이 곳에서 빨간색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맘껏 뽐내며 자기만의 자태를 온몸으로 뿜어내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자리를 정한 땅의 호미질 몇번에 요녀석이 또 나왔다.
땅을 팔 때마다 나오는 이 작고 하얀, 조금은 징그럽지만 지금은 익숙, 친숙해진 녀석.
매미의 유충, 굼벵이다!
이 녀석의 느닷없는 등장은 이 곳에서 흙을 파내고 돌을 들추며 흔하게 겪은 일이지만 이 날, 내 맘은 달랐다.
사실 마당을 일구다 처음 이 녀석을 만났을 땐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모양새가 징그러워 삽으로 파낸 흙과 함께 멀리 던져버리곤 했는데 이 날은 '어이쿠! 내가 뭔 짓을 한거야...' 심장에 큰 요동이 일었고 책이나 사람만이 아니라 이 굼벵이를 통해 큰 것을 알게 되었건만 단지 모양새가 보기 싫다고 스승도 못 알아본, 배은망덕한 나의 위선과 마주쳤던 순간이었다.
나에겐 아직도 일종의 '허영심'이 남아 있나보다.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하고 더 근사한 것들이 나에게로 오길 바라는, 오로지 나는 그것들을 취할 수 있다는, 내가 그 아름다움의 높은 취향을 지닐 소유자로 적격이라는 그런 허영심.
인간인 내가 '아름다움'의 모델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결단코 없는데(주)도 불구하고 '높은 아름다움'을 취하려는 한 인간의 '낮은 추함'을 내게서 발견해 어찌할 바 모르고 난 가만히... 한참동안... 나를 그 자리에 세워두었다.
신나는 놀이로, 마치 무언가를 창작하고 도전하는 것마냥 나는 도취되어 있었을 뿐, 이 모든 것들이 지닌 본연의 '이유'를 간과하고 나만의 척도에 맞춰 그들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정도로 시력과 심력이 퇴화된 나와 만난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조실부모하여 주어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운명지어진,
그렇지만 담담히 자기색으로 자기모양새로 자기 터를 잡고 때를 기다리는 굼벵이.
언덕의 모든 나무들 가운데 가장 화려한 색으로 온몸에 해를 받으며 앞으로 수십, 수백년을 그 자리에서 끄떡없이 자기를 바랄봐줄 부모를 둔, 그 화려함에 넋을 잃은 누군가가 고이고이 영접하다시피 모셔와 더 화려하게 자라달라고 부탁하며 가장 해가 잘드는 터로 옮겨진 단풍.
순간 나는
운명에 순응하며 때를 기다리는 흙수저의 터를
아무런 양해도, 허락도, 배려도, 조치도 없이 빼앗아
금수저에게 넘겨버린 못된 중개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거의 짐작하건데 단풍아가도, 매미유충도 비슷한 나이일테다. 태어날 때 부모덕에 한 녀석은 금수저로, 한녀석은 흙수저로 태어났겠지만 내가 부모로 있는 한 이 두녀석 모두 자기 몫을 다하는, 자기생김대로 살아낼 어른으로 키울 것이다. 자연에서 그대로 살았다면 더 잘 자랐을 녀석들인데 '나의 허영'이 인연의 고리가 되어 우리가 만난 이상 나와의 인연이 악연이 아니라 호연이 되게끔 나는 잘 키워낼 의무도 있고 나의 두 아이들이 '꿈'하나로 자기 길을 당당히 걸어가듯 내게로 온 단풍아가와 매미아가도 반드시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걷게끔 키울 수 있다.
굼벵이.
땅속의 현충(賢蟲).
우리 마당에서 수시로! 자주 만난, 반가운 녀석...
기가 막힌 울음소리로 여름내내 울어대며 짝짓기에 성공한 매미의 알은 나무껍질 속에서 무려 1년이나 살다가 알에서 깨어나면 땅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또 10여년을 보낸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하얗고 둥근 징그럽지만 알고 난 후부터 땅속현충이라 내게 불리는 이 귀하디 귀한 현충은 무려 1년간, 내가 이 곳으로 오기 훨씬 전부터 이 터에 높이 솟아있던, 얼마전 내가 베어내버린 나무, 아니면 지금 잎을 떨군 벗나무에서 태어나, 그 껍질에서 1년을 보내고 지금 내 호미가 들춘 내 발이 닿는 땅속에서 자신만의 화학변화를 일구며 매일매일매일... 그렇게 자세를 고정시키고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여름이 지났으니 3달?
여기 흙과 풀이 높이까지 있었으니 1년? 3년?
글쎄...
얼마나 긴 시간을 이 곳에서 이 자세로 꿈쩍않고 웅크리고 있었는지 난 알 수 없다.
단지 짐작컨데 그리 깊게 파지 않았는데 드러나는 것을 보니 올여름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러번 이번 연재글에서 언급했지만 밀림이었던 이 집은 나무에 가려 해가 들지 않아 차고 축축했다. 오자마자 집으로 드는 해를 가리는 나무를 모두 베어냈다. 아... 정말 나무를 베어내면서 처음에는 나무에게 미안한 맘을 가졌고 이후에는 '아니지, 해를 나눠야지!'하며 당당해진 나였는데 내가 미안해해야할 대상은 나무만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땅속현충의 고향을 없애버린 것이며
그 나무에 기생하며 살았던 수많은 곤충들의 고향까지...
그런데 어쩌리...
내가 이 곳에 터를 잡았으니 나눠 살자.
나도 해를 받아야 하니까...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겠다.
이것이 공존이니까.
두 발달린 인간인 나는 내대로,
날개달린 녀석은 날개달린대로,
다리 여럿달린 녀석은 그렇게 너희대로
다리없는 너는 그렇게 너대로...
모두 같은 생명체로서 각자의 터를 존중하며 양보하며 보호하며
우리 공존하자.
나도 너희를 품을테니 너희도 나를 품어라.
이야기가 딴 데로 샌 것 같아 다시 돌아와야겠다.
여하튼 궁금하다.
처음에 징그러워서 저~어기로 툭! 던져버린 녀석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을까?
어쩌다 나온 녀석들 그냥 다시 땅속으로 묻어줬는데 그래도 계속 살아있겠지?
자연 속에서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
지금까지 가진 지식들이 여기서는 소용없는 것들뿐이니...
유아시기에 급격한 환경변화는 인간의 정신과 정서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인간의 생애발달주기상 36개월에서 5세까지의 불안정한 환경은 대상이든 대물이든 대인이든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평생 그로 인한 성격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는데 매미와 단풍도 그럴까? 그렇다면 내가 이 녀석들에게 뭔 짓을 한거지?
물론, 이렇게까지 오버해서 오지랖부릴 정도로 가슴이 아픈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슴 한구석 찜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이 짓(?)은 과오일까, 당연일까? 착취일까, 공존일까? 변화일까, 변질일까? 아.. 생각그만!! 굳이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니 땅을 팔 때, 분명 이 녀석들이 또 나올텐데 그 때엔 지금처럼 소중하게 바라보고 귀하게 다시 제자리로 묻어주는... 그렇게 하자.
그러면서도 나는 땅속현충이 하루종일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현충에게 나는 물었다.
'지금 웅크린 너는... 네게서... 날개가 돋아 날아오를 것을 알고 있니?'
'지금 꼼짝않는 너는... 네가... 태어난 나무 위로 다시 올라갈 것을 알고 있니?'
'지금 파묻힌 너는... 네가...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소리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니?'
'지금 갇힌 너는... 네 생이 여름 한철 잠깐인데도 어떻게 10여년 웅크리고 있을 수 있니?'
현충에게 나는 들었다.
'나는 지금... 웅크리고 있지만... 내 안의 위대한 믿음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단다.'
'나는 지금... 꼼짝않고 있지만... 내 안의 위대한 양식으로 엄청난 화학변화를 일으키고 있단다.'
'나는 지금... 파묻혀 있지만... 내 안의 위대한 본능으로 제 아무리 단단하고 두텁고 강렬한 흙도 뚫을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있단다.'
'나는 지금... 갇혀 있지만... 여름한낮 가장 뜨거운 태양아래 가장 강력하게 울어대는 것으로 내 삶의 존재가치를 증명해내는 것, 그것이 내 삶이니 웅크린 10여년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현충이 나에게 묻는다.
'나라는 사람... 위대한 양식으로 나를 채우고 있는지'
'나라는 사람... 날개를 돋기 위해 오늘의 화학변화에 얼마나 진심인지'
'나라는 사람... 누군가 충분하다 해도 나에게서 불충분을 파헤칠 힘을 지녔는지'
'나라는 사람... 창조의 새로움에 홀로라도 묵묵히 해낼 마력같은 의지를 지녔는지'
'나라는 사람... 스스로를 증명해 낼때까지 인고의 화학적 변화를 버텨낼 인내는 지녔는지'
그렇게
'나라는 사람... 자기안을 유영할 자유를 위해 고뇌와 노닐도록 정신을 계속 깨우는지'
'나라는 사람... 거대한 궤도의 시선으로 오늘 하루를 가동시키는 쾌락의 역동성을 아는지'
흙수저든 금수저든
생명의 탄생은 이유가 있어서일테니 우리 함께 이유를 찾기로 하고
나는 어린 단풍과 유충을 같은 자리에 담았다.
지금은 화려한 단풍이 드러나고
현충은 땅속에 몸을 묻고 있지만
화려한 단풍은 낙엽으로 한생을 살다가 현충의 후손을 덮어줄 토양의 양분이 될 것이며
땅속에 몸을 묻은 현충은 때가 되어 흙으로부터 솟구칠 때까지 토양의 다양한 미생물을 생성해내고 수분을 보유시켜 단풍을 더 튼실하게 자라게 도울 것이다.
자연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이유없이 존재케하지 않는다. 나같이 아둔한 인간이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며 보이는 것으로, 지금 가진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조각내는 것이지, 자연에는 그 어떠한 것도 서로 돕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자기를 온전히 내놓지 않는 것이 없다.
아끼고 숨기고 미루고 서두르고...
자연에는 어떤 술수도, 묘책도 없다.
그저 자신이 지닌 하나의 방식으로 자연의 속도에 맞춰 전체의 조화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건다.
'고유한 자신'으로 '전체의 다양성'에 협력한다.
오로지 '자신만의 삶'으로 전체의 효모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은...
주어진 자신의 속도로... 천천히... 기다리며... 견디며...
하지만 아주 세밀한 조화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되며...
존재로서의 자신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나도 자연인데...
그렇게 나도 나의 길을, 인간의 생을, 인간답게, 자연답게, 나답게 증명해내야 하지 않을까...
주> 우상의 황혼, 니체, 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