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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의식혁명

ch1. 나를 해체해보니 1

by 지담

본 글은 제목도 미정이고 글도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출간을 염두에 두고 그저 써내려 가는 글이라 제목도 마음 내키는대로 그때그때 수정될 예정이며 당분간 -새벽독서로 깨달은(배운) 어떻게 살 것인가-로, 문제도, 어투도, 내용도 오락가락할 것 같습니다. 단편에세이가 아닌 글을 써내려는 과정에서 의례 겪어야 하는 수순이라 그대로 노출하는 용기를 내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라 외면마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글을 사랑해주시는 독자분들이라면 연재되는 글이니만큼 지난 1~4 편을 먼저 읽으시길 권해드립니다. 또한 매일 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브런치발행은 매일 하지만 본 글은 매일 쓰지 못하며 띄엄띄엄 발행이 될 수도 있는 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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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의식혁명]

나는 죽을 때까지 어떤 공간에 머문다. 집에서 지하철로, 또 학교나 집안에서도, 간혹 여행할 때도, 나는 공간을 찾아 늘 이동한다. 작은 방안에서도 침대에 들어갔다가 책상 앞에 앉았다가 방바닥에 드러누웠다가 항상 어떤 공간에 의지한다. 이렇게 나의 육체를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는 주체가 뭘까? 바로 정신이다. 정신이 방황하면 신체를 움직여 새로운 공간으로 자신을 자꾸만 이동시킨다. 새벽에 책읽을 때도 정신이 자꾸만 어딘가로 탈출하려치면 커피타러, 테라스나가려, 괜시리 화장실 한 번 더... 또 어떤 날엔 정신따라 미술관으로, 공원으로, 때론 시끄러운 음악 속, 자연속, 여기저기로 나를 밀어 넣는다. 이로써 나는 신체의 이동 빈도에 따라 정신상태를 가늠할 수 있고 신체는 정신의 명령에 거의 방어없이 따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신이 신체를 이동시켜 뭘 얻고자 하는 것일까?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속에는 양평강가에서 활짝 웃는 내가 있다. 그 때의 정신은 왜 신체를 그리로 이동시켰을까? 그리고 무엇이 나를 활짝 웃게 했을까? 바로 내가 느끼는 감각(시각, 촉각, 후각 등) 때문이다. 어떤 연유로 정신이 그 곳에 나를 데려다 놓았든 그 때의 나는 강을 보며, 자연의 향에, 맑은 공기에 모든 감각을 맡기며 정신을 환기시켰을 것이다. 그 공간으로 인해 나는 활짝 웃는 것이니 정신이 신체를 이동시키는 이유는 결국 환기를 원해서인가보다. 환기란 외부의 것을 진입시켜 내부의 일부를 빼내며 섞는 상태다. 즉, 정신이 환기를 원할 때 나는 신체를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자, 이쯤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만약 우리가 주말마다, 또는 더 자주 여기저기로 바람 쐬러 가고 싶다고 느낀다면 우리의 정신이 더 자주 환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정신에서 빼내거나 투입시켜야 할 것이 많다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의 정신이 방황하고 있다는 증거라 해도 무방한 듯하다. 그러한데도 정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신체를 여기저기 옮기며 감정만 달랜다면 계속 정신은 신체를 더 바쁘게 이동시키게 된다. 집에 들어가기 싫고 혼자 있기도 싫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누구라도 불러내어 시간을 떼우려 하는 증상과 비슷하다.


반면, 굳이 신체에게 여기저기 다니라 명령하지 않는 정신의 소유자를 가끔 만난다. 물론 성향상 다니기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굳이 환기시킬 것이 없거나 실컷 환기가 되어 있는 정신으로 충분히 충만함을 느끼는 이들이다. 이런 정신은 스스로 정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질서가 잡힌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이 방황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제대로 지키고 있으니 굳이 여기저기 신체를 옮겨가며 이런저런 감각들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강한 정신인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질서있는 정신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신의 부가 갖춰져 있다면 스스로 고립을 택하면서도 외롭기는커녕 자신만의 향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움직임을 통해 내 정신상태를 들여다보는 것을 좀 더 해보자. 나의 신체가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정신과 연관된 것임을 알았으니 이제 정신에 대해서만 거론해 보겠다. 자주 경험하겠지만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에 골똘히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시끄럽고 어수선해도 뭔가에 집중해서 빠져드는 경우는 누구나 겪어 봤을테다. 반면, 조용한 방안에 잘 정돈된 책상 앞에서 책을 펼쳤지만 책과 내 눈 사이, 그 짧은 거리조차 정신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어디로 도망쳐버린. 분명 눈 앞에 펼쳐진 환경은 책을 볼 수밖에 없는 물리적 조건을 갖췄음에도 내 정신이 어딘가로 이탈했던 경험 또한 누구나 겪어봤을 것이다.


이 단순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경험만으로도 정신은 외부 공간과 ‘나’를 단절시킬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고, 또한 외부 공간과는 무관하게 ‘나’를 외면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은 이렇게 물리적인 환경과 그 상황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감각을 외면 내지 방치시키고 자기 갈 곳을 가버리는, 신체적 감각과 환경 모두를 맘대로 이탈하는 자유로운 습성이 있다. 결국,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방황하는 정신이 가진 자체의 본성 때문인데 그 자유로운 녀석에게 나는 자주 진다. 하지만, 복잡한 지하철에서도 정신을 한 곳에 빠뜨릴 수 있는 것처럼(그 빠진 곳이 어디든 간에) 어떤 환경에서도 이탈한 정신을 다시 제자리로 데려올 수 있는 힘도 내 안에는 있다.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 정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며 그 힘이 앞서 언급한 의식적 사고의 힘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정신차려!'라는 말, '정신을 차리게 명령하는' 그것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주체가 '의식'이다. 이탈한 정신을 다시 제자리로 데려오라고 지시하는 게 의식이라는 말이다. 의식이 그걸 알아채는 것이다. '아. 정신이 또 엉뚱한 곳으로 갔군. 정신 데려와야겠다.'라고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말한다. '아! 정신 차려야겠다'라고.


그런데 여기서 의식하지 않는 의식, '무의식'은 그냥 내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하게 냅둔다. 음악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우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냥 늘 하던대로 '의식하지 않고' 그냥 하는 거, '무의식적으로 그랬어'라는 말 그대로. 하지만 의식은 늘 무의식과 싸우라고 정신에게 지시한다. '음악 그만 듣고 할 일 해야지!'하면서 말이다.


자, 그런데 '음악 그만 듣고!'와 같이 의식이 명령하게 하는 또 어떤 주체가 있지 않을까?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서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엔 뭔가 찜찜하니 찾아보자.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대충 찾다가 '없어'하고 뒤돌아서는 느낌? 이건 참을 수 없다. 자, 의식에게 지시하는 그 무언가가 바로 잠재의식이다. 쉽게 말해서, 잠자고 있는 의식이다.


잠재의식은 한마디로 바보같은 녀석이다. 바보라서 의식이 넣어 주는대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성이 열일하며 인식에서 멀어지고 의식속에서 자주 활동하면 잠재의식은 ‘아, 우리 주인의 이성이 또 출동해야겠지?’라고 인식하고 계속 이성을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반복한다. 반대로, 의식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정신이 맘대로 돌아다니게 냅두면 ‘아, 우리 주인은 정신을 맘대로 냅두는구나’라고 인식하고 정신이 맘대로 돌아다니게 냅두는 것이다. 즉, 잠재의식은 습관보관창고라고 할 수 있다. 잠재의식에서 고착된 것은 무의식으로 내재되어 나의 에너지의 기저(基底)가 된다.


늘 부정적인 말만 내뱉는 사람은 감각이 느끼는 대로 감정이 상한 채 이성이 필터링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정적인 표정과 행동을 드러내게 되고 그 행동에 대해 제재를 가하지 않은 의식 탓에 잠재의식은 그대로 ‘아, 우리 주인은 부정을 느끼면 못난 말을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며 그것이 반복되면 무의식에 내재되어 부정이 가득한 에너지로 세상을 살게 된다. 긍정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긍정적인 사람 역시 부정을 느낀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와 다른 점은 의식이 출동하여 부정적인 감각과 감정을 긍정으로 해석하도록 의식이 첨가된 사고작용과 이로써 연결된 행동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그대로 잠재의식으로 들어가 무의식에 고착되므로 늘 긍정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정리하면 인간의 내적 정체성부터 외적표현까지의 과정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감각-감정-의식-정신-행동-잠재의식-무의식 순으로 계속 순환하며 ‘나’라는 사람의 인격과 결과 인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고 정신없어!’라는 말도 우리는 쉽게 내뱉는데 실제 정신이 없는 사람도 없으며 정신 속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없다. 모든 자연은 에너지의 파동으로 서로 교류하며 에너지는 진공상태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에도 역시 빈공간은 없다. 무엇이 채워져도 채워져 있다. 아무것도 채울 수 없고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공간’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우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간’으로 되어 있으므로 우주 안은 꽉 차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우주의 일부인 나, 나를 이루는 모든 공간 역시 꽉 차 있다. 모든 것에는 그에 합당한 무언가가 채워져 있다.


정신이라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생각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내가 주체가 아닌 생각으로 내 정신이 채워져 있다면 나는 내가 아닌 이상한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내가 주체가 된 ‘의식적 사고’를 하는 ‘이성’으로 채워져 있다. 얼마나 숱하게 트레이닝을 했는데 아직도 생각 속에 빠져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 통제권 밖에 존재하는 ‘생각’으로 채워진 정신에 의식이 개입하지 않으면 내 정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니 나는 의식적으로 내 정신을 다룰 수 있는 것에 대해 인생을 유리하게 사는 참으로 필요한 기술을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인간은 앞서 언급한 의미로서의 이성적인 사고가 기능할 때 ‘인간=이성적 동물’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내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나=인간’이라는 등식도 성립한다. 그러니 단순하다. 정신이 생각을 없애고 인식의 문을 닫고 의식 속에서 이성이 움직이게 한다면 ‘나=인간=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해도 될 것이다.


물론 '이성'의 수준 정도나 밀도에 따라 '사고'하는 수준은 다를 것이다. 일단 이성은 기존의 관성적으로 쌓인 생각 덩어리, 즉, 관념이 주를 이루는데 우리는 ‘의식적 각성’을 통해 이 관념을 계속적으로 깨고 부수고 다듬고 연결하고 섞고 내보내고 새롭게 진입시키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의식의 개혁, 진화, 승화를 이뤄나가게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어 어떠한 질적인 차원으로 진입했을 때 우리는 ‘통찰’이나 ‘창의’, ‘직관’과 같은 메타인식의 차원을 경험하게 되며 나는 이것을 ‘자아의 의식혁명’이라 부른다.


==>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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