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눈은 울고 있니?'
최근에 나에게 있었던 좋은 일과 안 좋았던 일은?
타원형 액자 두 개가 그려져 있는 종이가 아이들 앞에 놓인다. 한 액자에는 최근에 자신에게 있었던 좋았던 경험을, 다른 한 액자에는 안 좋았던 경험을 간단하게 그림 또는 글로 표현한다. 그리고 서로 그 경험을 이야기하고 서로 마음을 공감해 준다.
그룹상담시간에 정서공감 활동으로 종종 하는 작업이다.
어떤 아이는 액자가 꽉 차도록 세세하게 그림을 그린다. 액자가 터지도록 빽빽하게 글로 풀어내는 아이도 있다. 액자 밖으로 그림이 튀어나가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액자 안의 반의 반 공간도 다 쓰지 않고 친구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봐도 뭘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어떤 아이는 안 좋았던 일 액자를 거의 폭탄처럼 꾸미는 경우도 있다. 얼마나 감정을 쏟아 넣는지 연필심이 툭툭 부러지거나, 지웠다 그렸다는 반복 해서 도통 뭐가 뭔지 모르는 추상화가 되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이들은 ‘좋았던 일 액자’와 ‘안 좋았던 일 액자’를 꾸밀 때의 표정이 다르다. 마치 두 액자에 자신들의 표정이 각각 그려지는 듯하다.
음악으로 치자면 장조와 단조의 대비라고 할까.
“속상했던 일 없어요. 진짜예요!”
수진(가명)이는 액자가 그려져 있는 종이를 받을 때부터 벌써 표정이 안 좋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기분에 대해 예를 들어주고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자고 하는 나를 바라보는 수진이의 눈망울이 벌써 촉촉하다. 다른 아이들은 저마다 얼굴로 장조와 단조의 표정을 드러내며 액자를 채워가는 중에도 수진이는 애꿎은 연필머리만 꾹꾹 눌러댄다. 작은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나는 수진이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기에 조금 기다려준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어떤 기분을 느낄 수 있는지 여러 예시를 들려준다.
늘 시작할 때 시간이 필요한 아이. 유난히 자기감정에 대한 활동에 회피가 심한 아이, 그룹 친구들의 반응에 민감한 아이.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수진이는 ‘좋았던 일 액자’를 채워가기 시작한다. 역시 그림이 작다. 그래도 미세하게 입가에 미소가 보인다. 살짝 어깨도 다시 펴진 듯하다. 좀 더 그려 넣어도 좋으련만, 금방 연필을 놓아버린다.
“수진아, 너무 잘하고 있네. 이제 다른 액자도 꾸며보자”
수진이는 다시 어깨를 살짝 움츠리더니 나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리고는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무언의 메시지로 종이를 나에게 내민다. 나는 다시 종이를 수진이 앞에 놓아주며 다독여본다.
예상대로, 수진이는 원망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금방 울음이 터질 듯한 눈망울이다. 그리고는 울음 섞인 말투로 하는 말.
“속상했던 일 없어요. 진짜예요!”
누구보다 속상했던 일이 많았을 수진이. 감정이 치고 올라올 때 목울대에서 꾹꾹 눌러져 나오는 목소리로 ‘진짜예요’라는 말을 하는 수진이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친다.
결국 수진이의 액자 하나는 비어버렸다.
비어있는 액자
속상했던 일은 전혀 없다는 수진이는 늘 '눈이 울고 있을 때'가 많은 아이다.
엉엉 소리 내지 않아도, 눈물이 또로록 볼을 타고 흐르지 않아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지 않아도 울고 있는 눈물이 있다. 그것은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이다. 그 눈물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숨길 수 없는 것이 바로 눈망울이다.
불안과 긴장이 많은 아이. 감각이 민감하고 겁이 많은 아이, 실패와 타인의 반응에 쉽게 마음이 무너져버리는 아이.
아이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회피를 선택했다.
불안, 좌절, 분노, 부끄러움, 긴장, 슬픔, 후회, 미움....... 아이에게 이런 감정들은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는 늑대이다. 아이는 늑대가 너무 무서워서 도망 다닌다. 아주 살짝 어떤 소리만 들려도, 그림자만 보여도 그것이 늑대라고 이미 단정 짓고는 도망쳐버린다.
그. 러. 나.
아이는 그것이 늑대가 아니라 어쩌면 귀여운 강아지일 수도, 종달새일 수도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직면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 실체를 모르는 것이다.
그저 아이는 도망치며 생각한다.
'왜 이렇게 세상에는 무서운 늑대가 많을까.'
수진이는 그래도 점점 힘이 생기고 있다. 나는 그 작은 어깨와 손에 단단하게 들어가 있던 두려움 덩어리가 아주 조금씩 말랑해지고 있음을 안다. 수진이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은 실체를 바라볼 용기가 두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을지라도 그 용기가 조금씩 커지고 있음을 안다. 그래서 나는 또 어느 때가 되면 빈 액자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수진이에게 연필을 쥐어 줄 것이다. 만약, 또다시 빈 액자를 나에게 다시 내민다 해도 괜찮다. 왜냐하면 수진이의 용기는 계속 커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진아, 괜찮아. 너를 위한 빈 액자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