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필자 Oct 12. 2023

탄생

 새해를 불과 며칠 앞둔 어느 날. 요전번 지원했던 공모전에서의 탈락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절차는 간단하다. 휴대 전화 액정에 뜬 당선자 명단을 엄지로 탁탁 내려 읽어 보기만 하면 끝.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 이름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나갔다가 들어와 다시 한번 찬찬히 정독해도 결과는 같았다. 의심의 여지없는 명백한 탈락.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올 연말도 마음 편히 보내기엔 글렀다는 것을.  


 그렇다고 딱히 새삼스럽진 않다. 최소한의 통보조차 생략된 이런 스마트한 탈락을 처음 겪는 일도 아니고. 수년간 반복되어 온 불유쾌한 패턴을 통해, 난 세상엔 승복할 수밖에 없는 아침도 있음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더불어 그런 아침을 환기시킬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야말로 신속하고 포만한 아침식사라는 진리 또한 함께.


 슬슬 출출해졌으므로 진리를 행하러 미적미적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탈락의 아침이면 거듭된 폭식으로 식품 회사들의 매출 증대에 작게나마 기여하고 있다. 과연 정신 건강에 유익할지 유해할지 모를 혼란스러운 나날의 와중에도 뜻밖의 작은 소득은 있었다. 만류할 줄 알았던 엄마가 당초 예상과는 달리, 그간의 내 실패들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거다. 평소 책이라면 질색인 우리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 글쓰기란 영혼을 까벗기는 일, 아무나 못할 중헌 일이라며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질 알았다. 내가 연거푸 공모전에 지원했다 떨어졌다 하는 동안에도 어째선지 엄마만큼은 초연했다. 아니. 정확히는 통달했다고 보는 게 맞는데, 내 생각에 그건 엄마가 소싯적에 겪었던 사건과도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건은 우리를 지점토처럼 형태 변화시키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엄마는 아빠와 중매로 만났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의 어느 여름. 을지로 골목의 작은 음악다방이 스물세 살 정수나와 스물아홉 살 이길연의 첫 만남 장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수나는 속칭 ‘얼빠’였다. 홀로 촌에서 상경해 인쇄소를 운영 중인 잘생긴 총각이 있단 소리에 선뜻 나선 자리였다고 한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무엇보다 직업적으로 활자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건강한 정신을 가졌을 거란 기대도 있었다. 다만 취향 차이랄지, 기대가 무색하게도 첫인상만큼은 영 꽝이었던 듯하다. 홍콩 배우 홍금보를 연상시키는 동그란 장발에, 위아래로 청청을 쫙 빼입고 걸어오던 이길연의 모습을 훗날 정수나는 이렇게 회상했다.   


 “키도 땅딸한 양반이 바지는 왜 그리 한껏 추켜올려선… 꼭 서커스복 같지 뭐니.”


 레트로랍시고 자식인 내가 당시의 이길연과 똑같은 패션을 구사하게 된 건 그로부터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다. 여하튼 그때까지만 해도 이 둘이 사귀게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보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지만 않으셨다면 말이다. 남자는 성실하고 제 밥벌이만 잘하면 그만이라며, 고령의 큐피드 역할도 서슴없이 자처하셨다. 흘려듣기엔 대단한 노익장으로 화살을 마구 쏘아대셨기에 기어이 한 발쯤은 스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명동과 남산과 경복궁 등지에서 몇 차례의 후속 만남을 이어간 일. 사랑보다 관습이 우선된 혼례가 속전속결로 치러진 일 등은 별로 특별할 게 없는 당대의 흔한 연애상이다. 식이 끝나자마자 둘은 미아리고개 어느 사글셋방에 신접살림을 차린다. 얼마 후 정수나는 첫 아이를 임신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는 결국 태어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악재가 그들의 운명을 틀어 놓았다. 결혼 전, 이길연이 자신의 친형에게 서줬던 보증이 화근이었다. 친형의 사업 자금과 관련한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는데, 그렇다고 그런 중대사를 무턱대고 저질렀다니. 아무래도 우애와 우매를 헷갈렸던 게 틀림없다. 이런 유의 사연이 대개 그러하듯 부주의한 선심 뒤에 따라온 풍경은 새빨간 압류 딱지였고, 종국엔 인쇄소고 뭐고 남김없이 탈탈 털렸다. 그 무렵 늘 텅 비어있던 쌀통이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세상 물정 모르던 나이의 젊은 정수나였으나, 강탈당한 게 살림뿐만이 아니란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 진짜 망했구나. 그나마 뱃속의 아이라도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한편 이 상황을 알고 있던 친가 어른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상황이 좀체 나아지질 않자 의외의 지점에서 무시무시한 창의력을 발휘했다. 생계를 빌미로 산모에게 은근슬쩍 낙태를 종용하고 나선 거다. 지금이야 더 나은 대체 언어들이 여럿 등장했다지만 그때만 해도 낙태는 그냥 낙태였다. 말 그대로 태아를 떨어뜨리자는 불순한 공모자들로부터 겨우 이십 대 초반의 산모가 고를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을 거다. 끝내 버티질 못하고 공모에 가담하고야 말았다. 이후에 행해졌을 외과적 처치들과 정신적 방치들에 대해선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고작 몇십 그램 남짓했을 어떤 무게가 누군가의 삶과 몸에서 영원히 이탈했을 테다. 그렇지만 결코 가볍다곤 할 수 없는, 아마도 한 생에 육박할 만한.  그건 이탈이라기보단 차라리 파괴에 가까웠다.


 몇 년 후. 일전의 아픔을 딛고 정수나는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한다. 마침내 내가 태어나던 순간이다. 난산이었다는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어쩌면 그때 내 등에 또 하나의 생이 업혀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조용히 생각한다.


 엄마는 이 모든 일들이 내가 글을 쓰게 되리란 암시 같다고 했다. 글도 절대로 한 번에 태어나는 법이 없다면서. 그러고 보면 글쓰기란 꼭 글 빼기의 다른 말 같고, 그건 일종의 건축 행위나 다름없다. 쓰는 동안 난 커다란 젠가 앞에 마주앉아있다. 개중 제일 쓸 만한 블록만 남을 때까지, 신중을 기해 계속해서 나머지들을 추려내야 한다. 그런 번거롭고 효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일련의 골조 공사를 거치고 나서야, 흡사 생물의 뼈와 같은 형상으로 마침내 글은 태어난다. 선결된 실패 뒤에만 태어나는 존재가 있단 사실이 내겐 가끔 기이한 소설처럼 여겨진다.  

 나는 꼭 태어나려고 웅크린 작은 낱말 같다.  


 밤늦은 시각엔 이런저런 핑계로 그동안 미뤄두었던 넷플릭스 영화를 시청했다.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틱, 틱... 붐!」이라는 영화였는데, 막 태어나려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 박동과 음률에 감탄하며 넋을 잃고 보다가 나는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젊은 시절의 정수나와 미처 생일을 맞지 못한 내 형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꿈이었다. 꿈이라 그런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서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드넓은 과수원에서 커다란 자두들을 수확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욕심 같아선 거기에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꿈이란 유한하고, 세계는 꿈 밖에 있고. 꿈에서 깬 뒤 어쩐지 입안에 새콤한 맛이 감돌았는데, 그래서였을까. 문득 이 겨울에 자두가 먹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내 태몽도 자두였다던 예전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엄마가 보았을 새빨간 자두의 모양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우리가 태어나리라는 것을 안다.



 탄생 [명사] 태어날 명사.





이전 01화 낱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