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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멍청한 짓을 여러 번 해서 고생 좀 하고 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도 고생하고, 배도 고파진다.
요즘 내가 하는 행동이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시간의 피로가 추진력을 얻을 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고 곧 후회한다. 정확히는 벽을 차면서 낑낑대는 것이다. 이때도 발이 아프다. 역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
피해의식은 건강한 사고를 좀먹는 생각의 태도이다. 피해의식을 완화시키려는 작업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소모적이게 된다. 시간이든, 노력이든, 돈이든, 뭐든.
달려드는 수치심과 굴욕감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서 뒹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생각한테도 두들겨 맞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면, 생각을 두들겨 패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러려면 웨이트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식사량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조건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변명이다. 보통의 식사량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도, 열심을 다하진 않았을 것이다. 게으름을 조련하는 일이 내 쪽에 어울린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성격이, 아마 나의 가장 뿌리 깊은 정체성일 것이다. 그걸 아끼게 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것도 굉장한 의지를 요구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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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화와 문학’이라는 수업의 첫 강의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판도라 상자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희망이 상자에 담겨 있었다는 것은 절망에 끝에서도 희망은 시작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에 담겨있던 가장 악한 재앙이 희망이었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에 남은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을 품는 순간 현재는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이 해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에게 희망은 그리 유익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절벽에 매달려 위를 바라보며 ‘한 발만 더 올라간다면 여길 나갈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바닥 아래를 보면서, ‘와 저기 떨어지면 나락이다’라는 공포심으로 한 발을 더 디디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안타까운 점은 현실은 곳곳이 나락이고, 희망도 공포심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절망과 바닥을 보고, 공포에 떨고, 피해의식과 수치심을 느끼고, 남들의 눈치를 보고, 겁먹고, 불안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두려워하는 것이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잘 될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보다는 훨씬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긍정적인 감정보다 에너지가 강하다.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보다 하기 쉽다. 다시 말해 부정적인 태도는 가장 효율적인 에너지원인 셈이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이 그러하듯.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 태도는 주변 환경을 오염시킨다. 정신이 황폐해지고, 주의하지 않는다면, 머리 한 구석 어딘가는 체르노빌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친환경 에너지를 연구하되, 그동안은 어떻게든 이 가난한 의지력으로 버텨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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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에 떠도는 ‘절대 가까이 두지 말아야 할 사람 유형’ 중 거의 대부분의 유형과 일치하는 사람이라는 게 조금 침울한 사실이긴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니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종종 놓치는 것은 그 유형에 해당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멀리 둘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가장 피곤한 사람은 본인 것이다.
또 책망하고 비난할 거리가 늘었다. 이렇게 얻기 쉬운 자원을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적으로 자신의 멍청함에 노여워하자.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무용하고, 자기소모적이고, 우울한 자기계발서를 누가 쓴다고 하면, 사례 조사 대상이 되어줄 수 있다. 그나저나 ‘자기계발서를 읽지 마라’라는 자기계발서를 쓴 사람은 훌륭한 논리학자가 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