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등산은 사양할래
“눈꽃 보러 강원도 갈래?”
폭설이 내린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남편이 물었다. 화대폰 화면으로 보여준 눈 덮인 발왕산 정상. 전혀 등산을 못하는 나조차 눈이 휘둥그레지는 풍경이었다. 오래 걸어도 뒷산 하나 못 오르는 나를 안심시키듯,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간다며 등산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 안 힘들다면 한번 가보지 뭐.”
검색해 보니 발왕산 눈꽃은 꽤 유명했다. 특히 ‘상고대’ 풍경 명소라고 한다. 상고대라는 단어는 처음 들었다. 찾아보니 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얼어붙은 서리라 한다. 그 투명한 빛깔이 마치 유리 같아 많은 사람들이 반한다고 했다.
새벽, 용평스키장을 향하는 길. 눈 온 뒤 맑아진 하늘은 푸르고, 뒤이어 올라오는 새벽빛은 시렸다. 일찍 출발했음에도 케이블카 승강장은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산허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케이블카 밖으로 눈이 가득 덮인 풍경이 펼쳐졌다. 나무보다 눈이 더 많아 보이는 장관. 정상에서부터 걸으니 힘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아무 생각이 안 들어올 정도로 눈부신 흰빛이 온 사방을 덮어 감탄만 나왔다. 투명하게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얼음 방울들은 바람에 날려 크리스털 부딪히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걷는 걸음마다 벅찼다.
“와! 진짜 멋있다!”
“오길 잘했지?”
“어, 진짜! 너무 멋있어!”
“다음에도 다른 데도 가볼까?”
“좋아!”
하지만,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원래 산을 좋아했던 남편은, 발왕산에 반한 나에게 이번엔 함백산을 제안했다. 만항재라는 곳이 차로 갈 수 있는 높은 곳이고 거기에서 조금만 가면 함백산 정상이라고 했다. 아… 그때 검색 좀 해 볼걸..
그렇게 떠난 두 번째 눈꽃 산행. 신이 난 남편은 새벽부터 배낭에 아이젠과 믹스커피, 보온병을 챙겼고, 나는 또 눈을 볼 생각에 설레어 차에 올랐다. 강원도 정선의 만항재에 도착하니 눈은 이미 조금 녹아 길이 위험하진 않았다. 주차장 근처 전나무숲에서 눈썰매를 타며 한바탕 웃고 즐겼다. 오랜만에 어린애처럼 ‘와!‘ 소리 지르며 신났다.
“자, 이제 함백산에 가볼까?”
“함백산이 어디야?”
“저기.”
남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산 너머 저 멀리 솟아 있는 정상.
“너무 높은 거 아냐? 저 정도면 나 못 가는데.”
“아니야. 이미 많이 올라와 있어서 별로 안 가도 돼.”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만항재에서 함백산 정상까지는 생각보다 훨씬 힘든 길이었다. 언덕 같은 오르막도 눈길이라 쉽지 않았다. 고개를 하나 넘었나 싶으면 다른 고개가 나왔다. 계단만 올라가도 헉헉대는 저질 체력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에 비해 남편은 오랜만에 산다운 산에 왔다면 날아다니는 듯했다.
“언제까지 가야 해?”
“조금만 더 가면 돼.”
그 말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발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힘드니 풍경도 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10미터마다 쉰 것 같다. 남편은 앞에서 잠시 서서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조금씩 조금씩 내 앞의 한 발, 열 발 앞만 생각하며 걸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넘게 올랐다.
멀기만 하던 정상이 드디어 가까워졌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 정상 바로 아래 가파른 돌계단이었다. 눈이 녹아 미끄러질까 봐 아이젠을 디딜 때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한 계단 무거운 몸을 올리는 게 이리 힘들다니. 조금이라도 공간이 있으면 주저앉아 쉬었다. 투덜대며 오르는 내 모습에 남편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끝은 있었다. 드디어 바위와 돌무더기 가득한 정상. 세찬 바람에 쌓인 눈이 흩날리고, 사방으로 산맥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전까지 차오르는 숨으로 오르던 내가 잊혀졌다. 드디어 내가 진짜 ‘등산‘을 했다!
힘든 길 끝에 맛본 정상은 달콤했다. 발아래 펼쳐진 태백산맥 줄기를 동서남북으로 감상하고, 바람이 덜 부는 바위틈에 앉아 드디어 뜨거운 믹스커피도 마셨다. 가장 맛있는 커피였다.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미끄러지지 않게 긴장하며 내디뎠고, 힘이 빠진 다리는 자꾸 풀렸다. 남편 혼자였다면 훌쩍 다녀올 곳을, 나와 함께하느라 하루 종일 걸렸으리라.
등산을 정말 못하는 내가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수시로 기다려준 남편과 저 멀리를 보지 않고 한 발, 열 발만 내딛은 덕분이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길도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니 결국 닿을 수 있었다. 극한의 힘든 순간엔 멀리가 아니라 지금 당장 버티는 것으로 충분하단 걸 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힘든 건 힘든 거다. 지금 다시 가자고 하면? 단호히 거절할 거다.
남편은 또 제안한다. 이번엔 발왕산처럼 곤돌라로 오를 수 있는 덕유산 눈꽃을 보러 가자고. 멀지 않은 무주도 안 힘들다고 권유했다. 그 정도라면 뭐 다시 가볼 만하다. 다만, 함백산 같은 등산은 아, 이젠 정말 사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