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있다.
“어디 불편한데 없으세요?”
의례적인 인사라 여겨 별생각 없이 네,라고 답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빠짐없이 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수업 중 몸이 기울거나 틀어지거나 다리가 풀려있으면 질문을 받는다. 오늘은 어디에 기대고 서 있었나? 짝다리를 짚고 있었나? 산에 갔었나? 일을 많이 했나? 등등.
어떤 형태건 균형이 깨져 보이면 훅 하고 내 앞에 질문이 던져졌다. 선생님은 내 등도 부위별로 구분해 어제는 위쪽이 말렸었는데 오늘은 왜 아래쪽이 말렸는지 묻는다.
질문세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매일의 기분이 다르듯 자세가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 수업 집중도 마찬가지다. 정신 바짝 차릴 때가 있지만 마음은 간혹 어딘가를 헤맨다. 후회와 불안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하기도 한다. 문제는 매번 지금의 상태가 왜 그런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는 점이다.
왜? 왜? 왜?
원인을 나도 모를 때가 많다.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데 원인 분석까지 했을 리가 만무하다.
어느 순간 나는 ‘왜? 노이로제’에 걸렸다.
선생님의 섬세하고 꼼꼼한 수업이 좋았지만 질문은 힘들었다.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자로서 질문을 받으면 일단 얼어붙는다. 잠시 머리가 하얘진다.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괴롭혔다. 이럴 때 뭐라고 답해야 옳은가?
사람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썰을 푸느라 신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댄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 방어적 반응을 보였다. 나를 향한 공격으로 인식했다. 그렇다면 오늘 몸이 어떤가, 어떤 자세로 있었나, 현재 마음 상태는 어떤가는 나의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적어도 내가 잘 알고 좋아해서 남에게 말하고 싶은 사안은 아니다.
어느 순간 ‘질문’ 때문에 요가 수업이 싫어졌다. 선생님은 도대체 왜 자꾸 곤란한 질문을 할까. 조용히 면담을 요청했다.
“선생님~~~ 수업 시간 외의 사항에 대해 안 물어보셨으면 합니다.”
정성을 다하는 선생님께 이런 말 하기는 몹시 불편했으나 점점 예민해지는 상황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선생님은 앞으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어떤 하루였는지 스스로 관찰해 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수업 1시간 동안 나머지 23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몸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적성에 맞지 않는 요가를 간간히 견디고 있었는데 선생님께 거부의 말을 하고 나니 요가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너무 피곤했다. 하지만 기왕 시작한 김에 연말까지는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세 달쯤 지났다. 지금은?
쿡쿡.
근래 내가 제일 잘한 선택을 요가로 뽑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잘~~~ 하고 있다.
이 일로 나는 새로운 습관을 들이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가에 대한 저항은 자신을 살펴보는 것에 대한 저항과 맞물려있었다. 면담 후 선생님은 내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내가 말문을 열었다. 내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했다. 특별히 의식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내가 요가를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유연성 부족이나 근력 부족(물론 둘 다 심하게 부족합니다)이 아니라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 저항의 마지막 발버둥이 선생님과의 면담이었다. 신기하게도 그게 끝이었다. 이후 나는 걸으면서 나의 발을 살피고, 잠들 때 몸의 긴장을 알아차리고, 글 쓸 때의 구부정한 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알아차림은 나를 일상에서의 바른 자세로 인도했다.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알아차리자 조율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수업 중 아사나도 성장했다. 어렵고 불안정하던 자세가 편안하고 쉬워졌다. 요즘은 많이 늘었다는 칭찬도 듣는다. 요가의 목적을 아주 조금 이해하는 것 같다. 자신을 살펴보는 일이 기쁘기도 하다. 드디어 요가의 신나는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