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9. 마음에 관하여

by 바람

Y가 유튜브 쇼츠 하나를 보내왔다. 신기하게 생긴 생명체가 커다란 공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영상이었다. 깜찍 발랄한 그 아이는 ‘키네신(세포 내 세포분열, 물질의 이동, 단백질의 운반을 담당하는 운동 단백질<나무위키 참조>)’이라 불렸다. 자기보다 몇십 배 무거운 먹이를 이고 다니는 개미처럼 키네신은 부지런히 단백질을 옮기고 있었다. 어찌나 귀여운지 한눈에 반해버려 수차례 영상을 돌려보다, 문득 짠해졌다. 이렇게 내 몸을 살리려고 애쓰는 아이가 있는데 나는 무슨 짓을 했던가. 해로운 걸 마구마구 집어넣고 극한까지 몰고 갔으며 갖은 비난과 불평을 늘어놓았다.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몸은 건강했을 것이다.


키네신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키네신뿐이겠는가.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내 몸에는 색깔, 모양, 크기, 하는 일, 성격은 다르지만 직, 간접적으로 나라는 유기체를 유지하는 수많은 주민이 살고 있다. 매 순간 이들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나는 주민들의 거주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나의 과업은 외적 성취가 아니라 생이 끝날 때까지 이들을 보살피는 것일지 모른다. 이 정도 느꼈으니 앞으로는 잘하겠지, 자신을 믿기로 했다. 레슨 7.에 이은 반성은 이쯤 하고 마음 이야기를 해보겠다.


요가의 전 과정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육체를 넘어가는 일이고, 둘째는 마음을 초월하는 일이며, 셋째는 자신의 존재로 사라져 가는 일(오쇼, 쉼 中)이라 한다. 존재로 사라진다는 건 나로선 범접할 수 없으니 제쳐두겠다. 다만 마음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나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는 게 많았다. 자신을 한시도 가만두지 못했다. 게으른 거 아니냐, 이기적인 거 아니냐, 좀 더 너그러워야 하지 않냐, 융통성은 밥 말아먹었냐, 농담을 뭐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냐, 눈치는 왜 못 배웠냐 등등. 이런 말로 스스로 끝없이 할퀴어댔다. 한마디로 마음을 혹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성격 형성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지만, 성인이 되고 수십 년이 지났으니 지금의 성향에 대해서는 누굴 탓할 일이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자책이 많은 성격은 세상살이가 힘들다. 외부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자신을 비난하기에 바빠 사태 파악이 안 되고 좀 험악한 환경에라도 노출되면 쉬이 죽고 싶어 진다. 스스로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악순환을 거듭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즈음 마음 관련 책과 영상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몸속의 키네신 같은 존재가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키네신 같은 존재를 이하 ‘스승’이라 부르겠다. 내가 만난 스승들은 하나같이 사랑과 에너지가 넘쳤다.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정말로 그러했다. 어찌하여 그들은 이게 가능할까. 나는 몹시 궁금하여 예의 습관대로 열심히 탐독했다.


스승들이 하는 이야기는 궁극엔 같았다. 자신이 사랑 그 자체임을 깨달으면 된다(요가의 세 번째 과정과 비슷한 듯). 이 말을 들으면 훅, 하고 거북할 수 있다. 지나치게 종교적으로 비칠 수도, 낯 간지러울 수도 있다. 그리고 음~~~ 이건 너무 어렵다. 하지만 ‘궁극’에 이르는 ‘’은 다양했기에 직접 실험해 본 바를 소개하겠다.


가장 먼저 시작한 방법은 레슨 8.에서 말한 ‘관찰하기’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주체’가 있고 관찰당하는 ‘대상’이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주체는 ‘나’고 대상은 ‘마음’이 된다. 이 지점에서 나와 마음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스승들은 이것을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설명한다.


잠깐 용어를 정리하자면, 관찰은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보다’이므로 줄여서 ‘보다’로 표현하겠다. 이 ‘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한다’에 가깝다. 우리는 누구나 보고 있지만 이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생각과 감정에 매몰되어 생각과 감정을 자기 자신이라 여긴다.


마음공부가 처음인 사람은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지만, 생각과 감정을 자기가 소유하는 어떤 물건처럼 대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인식의 전환이 오면 ‘아, 이 생각이 올라오네. 저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정도로 마음을 대하게 된다. 이까지 따라왔다면 잠시 축배를 들어도 좋다. 그만큼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하다.

마음을 대상으로 볼 수 있다면 다음을 시도해 보자. 마음에 들락거리는 희로애락애오욕의 감정과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떠드는 생각을 모두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놓고 차별하는 경향이 있다. 이 생각은 좋고 저 감정은 나쁘다고 평가한다. 특히 나쁘다고 라벨링이 붙은 것들을 재빨리 눈앞에서 치워버리려 한다. 원하는 대로 된다면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차별당한 대상은 우리 주위를 맴돌며 더욱 자주 출몰한다. 눈엣가시로 여기는 순간 정말로 눈엣가시가 된다. 그러니 나를 찾아오는 손님을 모두 허용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게다가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과 감정은 요긴한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분노만 하더라도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만 걷어내면 일을 진행하는 추진력이나 어려운 상황을 견디는 힘이 될 수 있다. 불안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감정이 불안이라는데, 오히려 이 불안이 우리를 탁월한 능력자로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생각과 감정에 대한 편식만 멈춰도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차고 넘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과의 대화’에 관해 살펴보겠다.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전제하에, 자신에게 질문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실제로 답을 들을 수 있다. 자기 안의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뭐라 정의하긴 어려운데 이것을 무의식이라 해야 할지, 영혼이라 불러야 할지, 내면 아이로 봐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내 안의 스승이라 칭하고 있다.


내 안의 스승은 중요한 걸 결정해야 하는데 갈팡질팡할 때 길잡이가 되어주고, 힘들고 지쳐 하소연하는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가끔은 놀라운 안목으로 지혜를 알려주기도 하는데 최근에 내가 나눈 대화를 예시로 마음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질문을 던지게 된 계기는 여기서도 사랑, 저기서도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외치는데 도대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나에게 물어봤다.

‘바람아. 나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뭔지 모르겠어.’

‘있는 그대로의 수용이야.’

‘수용이 뭐야?’

‘판단하지 않는 거지.’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자신을 어떤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 거야. 난 이렇구나. 난 그렇구나. 자신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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