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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r 01. 2024

시의 시간

 수업 첫머리에 선생님이 황진이의 시를 읽어주셨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그리고 이어지는 감탄사.    

 

선생님은 너무나 잘 쓴 시라며 극찬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어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지.


 내가 봐도 그녀는 넘사벽이었다. 긴긴 시간을 잘라 저장해 두었다가 사랑하는 님이 오시면 펼쳐내겠다는 발상이라니.     


 이 시를 썼을 때 그녀가 느낀 시간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감탄으로 끝나면 수업이 아니므로 우리는 시간을 묘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문학에서의 묘사는 구체적인 사물로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복습 차원에서 6화 ‘서사보단 묘사 ’ 부분 참고).


 특히 시의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을 의미하므로 외부 상황과 경험자에 따라 시간의 모양, 색깔, 성질이 달라진다.


 그 변화를 무엇으로 대상화할까.

  

 선생님은 촘촘한 시간, 간헐적인 시간, 쓸데없는 시간, 견디기 힘든 시간, 지루한 시간, 평온한 시간을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수업을 들으며 ‘나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행복한 시간은 어떻게 나타낼까? 슬픈 시간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이 지배하는 시간을 무엇으로 비유할지 고민하다 보니 황진이에게 또다시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그녀였다!     


 그녀 외에도 해 질 무렵을 ‘촛불을 켤 때’라 드러내고 밤 12시를 ‘하루와 이별할 때’라 칭하는 시인들의 언어를 추가적으로 배웠다.     


 시간의 흐름과 관련해서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 화자의 시선이동을 넣거나 화자의 생각을 끼워 넣는 식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음을 암시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과제를 하는 마음으로 나의 시간을 표현하려고 몇 자 끄적여보았다.      


 나의 행복한 시간은 고양이 낮잠 같았고 나의 슬픈 시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 같았다. 월급을 기다리는 시간은 땅 위를 걷는 나무늘보 같았고 퇴사 후 보낸 시간은 KTX 같았다.     


 나열한 김에 평생학습센터에서의 수업 시간에 대한 시를 썼다. 선생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담아…        


  



시를 위한 시     


한 분기 시 수업이

콩나물시루에 부은 물처럼 빠져나갔다

         

백지 펼쳐놓고 끙끙대다

몇 자 적지도 못하고 끝인가 싶었는데    

   

혹시나, 검은 보자기 들춰봤더

수북하게 다리가 길어져 있네


           

*위 시는 짧아서 아쉬우니까 시간과 관련한 시 하나를 더 투척한다.    


 

달의 하루   


부모님 뵈러 시골집 들렀다   

       

딸 반기는 아버지 첫마디

"아빠 얼굴 이상하지 않니?"    


아빠 얼굴 살폈다 꼼꼼히

평상시와 다를 바 없다 더욱 꼼꼼히  

        

고개 갸웃하며 엄마 쪽을 돌아봤다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열없는 딸, 설레설레


아빠가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딸 기다리느라 눈이 빠졌어."    


지구가 서른 바퀴 돌 때 달은 한 바퀴

딸은 달을 닮았다




*후기


 '시를 위한 시'는 강평 때 숙녀들은 한 번에 이해했고 신사들은 갸우뚱거렸다.


 왜 검은 보자기인가? 다리가 길어지는 게 뭔가? 라는 질문이 쏟아졌다.


 '달의 하루'는 선생님께서 일취월장이라며 칭찬하셨다.


 너무 기뻐서 동생에게 톡으로 시를 보냈더니 잠시 후 답톡이 왔다.


 시평>

 흔히 달을 지구에 속한 종속된 위성으로 보지만

시인은 달은 딸, 지구는 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로 그리고 있다.


 달이 차고 기울고 다시 차듯

 자식이 아무리 변덕 부려도

 그저 자식이 어떤가 살펴보는 애달픈 부모의 마음을


 하루에 한 번씩 자전하는 지구와

 한 달에 한 번씩 자전하는 달에 빗대어

 귀여운 노부부의 내리사랑을 담아내 더욱 따뜻하다.


 톡을 받고 보니 시보다 시평이 더 훌륭해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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