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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9. 2022

115. '비꽃'을 아세요?

‘비꽃’을 아세요? ‘비꽃’은 비가 오기 시작할 때 성글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뜻하는 순 우리말입니다. 유리창이나 손등에 한 방울 툭 떨어지면 꽃 모양으로 번지는 것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오랜 가뭄 끝에 한두 방울씩 툭툭 듣기 시작하는 비는 마치 꽃 인양 가로수의 온몸에 무늬를 찍으며 천천히 스며듭니다.     

‘비꽃’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쓰지 않고 주로 북한에서 쓰이는 말입니다. ‘꽃’은 사물의 맨 처음 형상을 가리키는데 곰국이나 설렁탕 등을 끓일 때 고기를 삶아내고 아직 맹물을 타지 않은 진한 국물을 ‘꽃물’이라고 하는 것처럼 처음을 뜻합니다.     


‘비꽃’ 역시 비의 처음이라는 뜻으로 쓰이겠지만 오늘 내린 비는 그런 뜻보다는 그저 예쁜 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만큼 반가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겠지요. 오늘도 준비 없이 나갔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꽃에 옷을 적셔야 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았습니다. 아직 해갈이 되려면 한참 더 비가 내려야겠지만 잠깐의 비꽃 만으로도 갈증이 조금은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살면서 요즘처럼 이렇게 간절히 비를 기다린 적이 있었을까요. 비는 언제나 늘 훼방꾼 같은 느낌이었고 질척하거나 습하고 불편한 느낌이 먼저 드니 지금처럼 비를 간절히 기다린 적은 그리 많지 않았을 듯싶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큰 행사만 앞두면 왜 꼭 비가 오는 것인지, 소풍을 가거나 운동회가 있는 전날은 비가 올까 걱정이 돼서 늘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소풍 전날, 엄마는 분명 일기예보에서 내일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일어나보면 아침부터 장대처럼 비가 쏟아지는지, 빗줄기에 망연자실해서 일어나자마자 그만 펑펑 울었던 기억도 납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처마 밑에 앉아 먼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빗속에 아른거리는 풍경들은 왜 모두 먼 동화 속 풍경처럼만 느껴지던지, 비가 말갛게 그친 뒤 신작로에 무지갯빛으로 고인 기름띠가 예뻐 손으로 가만히 저으며 놀다 보면 어느새 먼 산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곤 했습니다.     


하교 길에 후둑후둑 비꽃이 듣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기 시작했고 어쩌다가 옆에 토란잎이라도 보이면 하나씩 꺾어서 머리에 쓰고 제법 여유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온 몸은 흠뻑 젖어도 머리하나 가린 것으로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행복했습니다.     


과일 장사를 하던 엄마는 ‘비 오는 날이면 공치는 날이요’라며 흥얼흥얼 가락까지 곁들여 부르다가 내리는 비를 어찌할 수 없었는지 어느새 밀가루를 풀어 김치를 썰어 넣고 기름 냄새 구수하게 김치전을 부쳐주기도 하셨습니다. 김치전이 아닌 날에는 식은 밥에 물을 넉넉하게 붓고 김치를 송송 썰어 넣은 뒤 굵은 멸치 몇 마리 넣어 김치죽을 끓이거나, 그도 아니면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떼어 넣은 말간 수제비를 끓이기도 하셨습니다.   

  

소나기, 이슬비, 장마비…,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의 비는 언제나 아련한 추억과 함께 떠오릅니다. 꽃처럼, 비처럼, 오늘 내린 비꽃처럼 참 아름답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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