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고로호 Apr 25. 2024

그믐달의 모습으로 남동쪽 하늘 위에 맺힌 마음

명상을 하러 다닌 적이 있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인데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 그것도 이른 아침 출근길 만원 버스를 타고 요가원에 가는 일이 고됐다. 지난번에 결석을 해서 이번에는 꼭 가야 한다고 굳게 마음을 먹은 날에도 나도 모르게 알람을 꺼버렸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가기 싫어, 더 자고 싶어!”라고 외치는데 요가원 선생님이 말해준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상칼파.


산스크리트어인 상칼파(sankalpa)는 의도, 목적, 염원, 다짐, 각오, 결심, 맹세 등으로 번역이 된다고 한다. 흔들리지 않은 마음으로 고요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평생 가장 큰 소망이었다. 그래서 요가원을 찾았고 일주일에 한 번 아침잠을 포기하는 대신 몸을 이완하며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했다. 수업 시작은 8시 20분이지만 출근시간에 경기도에서 서울로 넘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시간에 맞게 집을 나서면 길도 막히고 버스 안에서 숨도 막힌다. 나의 계획은 이랬다. 6시 전에 일어나서 준비하기. 6시 40분에 집을 나와서 비교적 한산한 버스 타기. 7시 10분 요가원 근처 아침 일찍 문을 여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입성하여 책 읽기 그리고 명상하기. 완벽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계획은 계획일 뿐. 밤이면 돌아가며 울어대는 고양이들 때문에 원래 수면시간이 불규칙한 편이라 서너 시간을 자고 일어나 출근길의 사투에 참여해야만 하는 일이 고역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점점 집을 나서는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만원 버스 한복판에서 서서 가야 했다. ‘그래, 이건 처음부터 무리한 도전이었어. 포기하자.’ 수업을 그만두려는 마음이 커졌을 무렵 선생님이 나의 동요를 알아차렸다. 요가원을 나서는데 선생님이 나를 부드럽게 멈춰 세우고 상칼파를 알려줬다.


수많은 이들이 매일 붐비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는데 일주일에 단 하루,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일에도 핑계를 대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 또한 십 년이상 혼잡한 출근길에 단련됐던 전직 직장인인데 지금의 나는 어쩌다 투지를 잃고 이렇게 나약해져 버린 걸까. 결심한 바를 이루기 위해 망설임 없이 행동에 나서는 사람은 얼마나 멋진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명상을 위해 일어날 것인가 따뜻한 이불속에서 다시 달디단 잠에 빠질 것인가 고민할 때는 읊조리는 것만으로 너무 날카로워 정신이 번쩍 드는 그 단어를 떠올렸다.





알람과의 사투에서는 승리했지만 계획보다 십 분이 늦어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가야 할 운명에 처한 날, 어떻게든 뛰어 버스를 잡아보려는데 아파트 후문을 나서다 문득 오른쪽 하늘에 뜬 작은 빛의 조각을 발견했다. 늦었지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믐달이었다. 손톱처럼 가느다란 달의 볼록한 부분이 왼쪽 아래를 향해 있는. 내 가방 안에는 어제 막 읽기를 마쳐 오늘 명상하기 전에 카페에서 정리할 생각으로 챙겨 넣은 책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가 들어있었고 이 책 덕분에 때마침 나는 달의 위상을 확실히 머릿속에 입력해 놓은 참이었다.

그믐달은 밤을 꼴딱 샌 사람들,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태양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소수의 사람들만 보는 그런 달이다.<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상칼파 덕분에, 그리고 반가운 우연으로 나는 그믐달을 만나게 됐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으슬으슬 올라오는 피로감도, 겨울의 추위도, 곧 타야 할 숨 막히는 버스도 그 순간의 강렬한 희열을 막지 못했다. 생의 부담과 허무를 마음속 어딘가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내 안으로 사는 게 재밌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믐달을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버스는 이미 만차여서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들어 뒷문 근처 기둥에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출근길에 오른 이들과 함께 어둠을 뚫고 서울로 향했다. 마스크틈으로 새어 나오는 사람들의 입김으로 유리창은 이내 뿌예졌다. 안내방송이 아니라면 우리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차가 급커브를 돌 때마다 배에 힘을 주고 발바닥에 묵직하게 실리는 하중을 참아냈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땅에 발을 내디뎠다. 희미하게 밝아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나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 그믐달은 이내 태양의 빛 아래 모습을 감출 것이다. 이불을 박차고 나오길 잘했다. 추위를 참고 나오길 잘했다. 언제 다시 희미해질지 모르겠지만 나의 상칼파가 오늘은 그믐달의 모양으로 남동쪽 하늘에 맺혔다. 매번 차고 기울지만 언제나 지구를 맴도는 달처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나의 바람 또한 그곳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