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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아 Oct 25. 2024

이름을 불러줘야 잊어먹지 않아요


차츰 밤이 길어진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내려간다. 이사한 뒤 처음으로 아파트 뒤편 산책로에 들어선 11월 초순, 키 큰 단풍나무들이 타는 듯 붉게 물들어 햇빛에 빛나고 있다. 아름답지만, 그걸 느낄 수 있는 내 안의 전극이 죽었거나 거의 끊어졌다. 어느 아침 반쯤 언 땅에 첫서리가 내리고, 그걸 밟는 내 운동화 바닥에서 부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아이들의 얼굴만한 낙엽들이 세찬 바람에 구르며 날아가고, 갑자기 헐벗은 플라타너스 줄기들은 버즘나무라는 한국어 이름처럼 희끗한 살갗이 함부로 벗겨진 것같이 보인다.


-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오늘도 다행히 가을이었다. 나는 내 딸의 이름을 가을이라고 짓고 싶었다. 이 땅에서 점점 희소해져가만 가는 가을이, 내 아이에겐 평생 붙어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내 딸은 3월 봄에 태어나서, 주변 사람들이 가을이라는 이름에 의아해 했다. 결국 다른 이름을 가졌고, 나는 마음 한켠에서 내 딸 아이의 또 다른 이름을 혼자 불러보곤 했다.


아이는 요새 자꾸 말을 하려고 한다. 오늘도 "저기 있다"라는 문장을 완성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이는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깜짝 놀라는 순간들을 계속 선물하고 있다. 아이는 매일 한치의 게으름 없이 성실하게 자라는 중이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오늘날 아이를 낳은 것까지. 모든 게 우연이었다. 나는 원래 결혼할 생각이 없었고, 해도 좀 늦게 하고 싶었다. 30대 중후반에 집을 사놓고, 일 같은게 완전히 자리 잡은 다음 이사람 저사람 만나면서 슬슬 연애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랑을 해버려서 모든 플랜이 물거품이 됐다. 




신혼 초에 이혼하고, 5년 결혼생활 끝에 이혼하고, 중년에 이혼하고, 노년에 이혼하는 수많은 부부들을 보면서 그들이 그래도 한때 사랑했다는 그 흔적을 숨은그림찾기처럼 찾아보곤 한다. 이제는 등 돌린 두 사람을 봐도 그래도 한때는 그 사이에 사랑이 있었을거라 믿고 싶다. 지금은 어쩐 일에서인지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게 그렇듯 사랑도 자꾸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거기다 시간이 지나버리면 사랑이라는게 지치는 책임감, 무게, 짐처럼 느껴져서 쓰레기 봉투에다 버려버리곤 한다. 


그럴 땐 자꾸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사랑이야. 우린 사랑을 했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마치 여름에서 겨울로 바로 건너뛰려고만 하는 어떤 계절을 가을이라 부르기로 약속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서로의 손을 놓게 되었고, 아주 예전부터 놓고 있었다는 걸 모를 때도 있었다.




사랑은 의외로 나만 잘 하면 되는거여서 내가 사랑하고 싶은만큼 사랑하면 된다. 그게 사랑이라는 행위의 전부다. 그래서 길을 잃는다. 퇴근 후 나에게 달려와 그제서야 엄마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웠고, 암흑이었는지를 깨달으며 나의 다리에 매달리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나에게 안겨 있으면서도 더 많은 관심과 더 깊은 사랑을 간절히 바라는 아이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사랑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까. 아이가 아직 어리니 일 같은건 역시 그만 두고 같이 시간을 보내주는게 맞는건 아닐까 하는 그런 혼란 말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계획을 세우고, 앞날을 그려본다 해도 그것을 100% 믿진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내 인생에서 느꼈던 가장 큰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연히 생겨버린 가족 덕분이었기 때문에, 또 이렇게 우왕좌왕 살다보면 어떤 우연한 행복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마음은 열어놓고, 현실에 충실하기를 다짐하곤 한다. 내일은 단풍잎을 주우러 나가볼 생각이다. 자꾸 땅에 떨어진 쭈글쭈글한 은행을 집어다 입에 넣어대는 아이와 함께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T98BToGE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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