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포건달 Aug 28. 2024

FW #40, 서촌 한옥마을(20.51km)

누적거리: 2196km, 누적시간: 444시간 53분

표지사진: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5가길, ‘두 연인’


봄, 서촌을 가다

나는 어쩌면,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보다 [서촌 한옥마을]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기억에 없는 장소’라고 가보지 않은 장소는 아니다. 서촌이 그렇다. 언제였을까? 내가 서촌이라는 곳을 다녀온 기억은 까마득하다.




걷기의 마지막 계절, 봄이 오다

오늘 나의 목적지는 애당초 없었다. 특히 서촌은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을 만큼, 기억에 없는 장소였다. 평소 계획 없이 나서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무턱대고 나왔다. 자주 걷던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고, 계속 걷다 보니 익숙한 곳을 지나 또 익숙지 않은 곳으로 걷게 되었다.


옷을 두껍게 입고 나왔지만, 봄은 확실히 오고 있었다. 1년간 걷기 시작하면서 사계절이 지나고 있는데, 봄은 그 마지막 계절이 되었다. 3월의 셋째 날, 마포 염리동 숭문길로 들어섰다. 새 학기를 앞둔 ‘숭문중학교’는 왠지 부산스럽다. 중학교 도로 옆에 개 한 마리가 색깔 옷을 입고 앉아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봄의 전령’이다.

서울 마포구 숭문길 - utopia dog (김우진 作), 주변의 잔재하는 모든 겨울 잿빛을 압도하는 ‘멋쟁이’


동네 언덕을 따라 올랐다. 염리동의 대부분은 새 아파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지막 여남은 낡은 주택들은 골목마다 애잔한 삶의 기록을 담고 ‘봄’을 품고 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 발걸음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저 아가씨도 자기 삶의 먼지 한 톨을 땅에 떨어뜨리면, 길은 고스란히 그것을 자기 배 위에 담고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염리동 숭문길은 내가 사는 집 근처에 있었어도, 나는 오늘 처음 걷는다. 가까운 모든 길을 섭렵하려면 멀고도 호기심 많은 동네를 나중으로 미루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었다. 그래도 오늘, 가까운 곳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낯섦은 덜해서 편하다.


숭문길 언덕 끝에서 이대역을 지나 아현동으로 간다. 이대역과 아현역 사이 고갯길은 예전에 미용실과 특히 웨딩숍이 많았다. 한마디로 ‘웨딩타운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숍들이 많이 사라지고 없다. 결혼하는 사람들도 적어지고, 결혼 문화가 바뀐 영향도 있으리라. 행복해야 할 ‘웨딩타운 길’이 왠지 쓸쓸하다.

서울 마포구 숭문길 186(염리동), 주택의 오래된 간판들이 정겹다
서울 마포구 신촌로 212(아현동), 웨딩타운 길



정동길 내, 아빠의 꿈

아현역과 충정로를 지나 덕수궁 돌담길로 잘 알려진 ‘정동길’로 잠시 빠졌다. 정동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화여자고등학교’가 나온다. 딸아이에게 학교 사진을 찍어 보냈다. “뭥미?” 딸의 문자 답변에, “엉, 우리 딸 내년에 들어갔으면 싶은 고등학교, 아빠의 꿈!”이라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헐~” 하더니, 더 이상 답이 없다. 싫은가 보다. 자기가 내신 깔아줄 일 있냐고 전에 그러더니만, 아빠의 마음 보다도 현실을 더 따지는 딸아이를 칭찬해주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사진 찍어 보내면 마음이 동할 줄 알았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온 김에 정동길을 따라 시청까지 걸었다. 아내에게 “당신 회사” 하고, 시청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역시 발끈한다. ‘누가 주말에 자기 회사 사진 찍어 보내면 좋아하겠냐?’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두 모녀의 모진 답변을 뒤로하고 인사동을 거쳐 경복궁으로 향했다.

충정로를 지나, 덕수궁 돌담길로 널리 알려진 정동길로 들어선다
앞에서 볼때는 참 정갈한 학교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화여자고등학교는 저 뒤에 백색 건물이다. 앞의 붉은 벽돌건물은 기념관이다
정동길의 돌담을 따라 걷는것만큼 정감있는 길은 없다
주말에 ‘시청녀’ 그녀에게 시청사진을 기념으로 보냈더니 발끈한다



인사동, 경복궁을 지나 서촌엘 가다

봄이 정말 왔나 보다. 인사동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확실히 작년보다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아지고, 인종도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중국인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유럽, 미주, 일본 할 것 없이 많은 곳에서 한국을 방문한다. 인사동이 인사동다워졌달까? 3년 전 코로나가 한창 기승일 때, 나는 인사동이 망하는 줄 알았다. 낮에도 그렇고, 특히 밤에는 9시도 안 되어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인사동에 3년 만에 다시 봄이 왔다.

인사동 거리를 활보하는 다양한 외국 관광객들


인사동에서 율곡로를 건너, 송현동으로 갔다. 덕성 여자 중·고등학교가 있고, 정독도서관이 있고, 북촌 한옥마을이 있는 곳이다. 그곳엔 100년간 사용하지 못했던 부지가 있었는데, LH공사가 2022년에 부지를 사 들여 ‘열린송현녹지광장’으로 만들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광장 사이로 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꽃이라도 만발하게 핀다면 상상만으로도 아름다워지는 공간이다.

서울 종로구 송현동, ‘열린송현녹지광장’. 22년 7월에 개장 되었다


‘열린송현녹지광장’은 바로 옆, 경복궁과 이어진다. 여기도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대문 앞에서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게 ‘해태’의 동상 뒤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앞쪽으로 인왕산이 보인다. ‘어라? 저쪽으로 한 번 가볼까?’ 어떤 끌림이 순간 왔을 때, 나는 보통 그것을 따르는 편이다. 모든 순간은 인연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서촌이 있었다.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던 인왕산이…
여기서 보니, 잘 보인다. 저 앞에 인왕산 자락이 갑자기 끌렸다
흰백의 자태가 아름답고 웅장한 경복궁 앞



서촌 속으로

서촌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맛집으로 가득하다. 분당이나 성수동 카페거리처럼 정갈하고 세련된 매장들은 아니지만, 옛스러움과 아기자기함이 서로 어우러져 서촌의 감성을 더욱 짙게 만들어낸다. 그 거리를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기와로 엉켜진 건물들이 한 폭의 연인처럼 팔짱을 끼고 다가온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 지역으로 옥인동, 통인동 등 총 9개의 법정동이 포함된다. 서촌이 북촌과는 다른 느낌이라면, 조금 더 서민적이고 덜 알려졌다는 것이다. 예부터 북촌은 관직이 높은 관리들과 양반들이 모여 살던 곳인데 반면, 서촌은 조선시대 통역관이나 의술에 종사하던 중인과 예술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이다. 그래서 나는 서촌이 더 정감이 가고,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다.

서촌 ‘세종마을 음식문화 거리’ 입구. 세종대왕의 생가가 근처에 있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나길. 골목이 정갈하고, 서정적이다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2길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퓨전서양요리 ‘송스키친’


서촌 거리 바닥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걷기에 좋았다. 삐그덕 거리지 않게 돌판이 서로 잘 어기어져 있었고 발목에 아프지 않았다. 단단한 돌덩이일지라도 사뿐했다. 또 한옥과 양옥이 잘 어우러진 집들마다 카페와 빵집, 음식점들이 종종거리며 모여있다. 그 사이로 외국인들도 많이 돌아다니지만, 젊은 우리나라 연인들도 행복한 얼굴로 가득했다.


볼거리가 많다 보니 역시 걷는 재미도 있다. 서촌의 필운동과 옥인동 옆으로 ‘통인시장’이 있다. 통인시장은 재미로 엽전을 구입하여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엽전으로 도시락 뷔페도 먹고 색다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딱히 가성비가 더 높은지는 모르겠다. 주워 담다 보면 필요 없는 양을 더 담거나, 엽전을 더 구입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골목 사이사이로 품고 있는 작은 카페들
건너편은 서울 종로구 통인동의 시작, 통인시장 입구이다


통인시장을 구경하고(기름떡볶이는 불취향이라 먹지 않았다) 옥인동으로 건너갔다. 옥인동은 인왕산을 올라가기 위해 ‘옥류동천’의 ‘수성동계곡’으로 갈 수 있는 동네이다. 올라가는 곳곳으로 작은 갤러리나 옷가게, 잡화점을 만날 수 있었는데, 동네가 원체 조용하고 산과 붙어 있다 보니 도심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봄바람에 어린 시절이 가슴에 파고드는 그리움 같은 거? 순수한 동네의 느낌이다.


서촌을 전부 돌지는 못했다. 광화문 ‘해태’의 등 뒤에서 바라본 인왕산이 이제 코 앞에 있다. 옥인동 끝에는 1980년에 준공된 ‘옥인연립’과 마을 버스정류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수성동계곡은 그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 동네 어르신의 뒤를 느릿한 걸음으로 쫒는 즐거움이 있다. 평생 남을 제치고라도 먼저 앞서려는 마음이, 이곳에서는 숙연해진다. 뒤를 쫓아 그의 인생을 바라보면 걷는 또 다른 매력에 푹 빠진다. 이런 시간이 아니라면, 나는 언제 초로의 인생 뒤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나 있을까?

옥인동 끝까지 오르면 인왕산으로 가는 수성동 계곡 입구가 나온다
수성동계곡 초입
물이 한 가득일때에는 천둥소리처럼 물계곡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수성동계곡을 오르는 동네 주민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서촌에서 꿈을 꾸다

서촌의 매력에 흠뻑 빠진 채 나는 다시 수성동 계곡을 넘어, 인왕산 자락을 타고 부암동으로 걸었다. 예전에 바리스타 한 분이 추천해 준 ‘더숲초소책방‘을 이번 기회에 방문하기로 했다. 유명장소여서인지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했고, 밖에서도 주차를 대기하는 차들이 많았다. 간단하게 빵 하나와 커피 한 잔을 시켰지만 오래 있지는 못했다. 맛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서울 시내 경치가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경치가 좋아서, 또는 내부 시설이 좋아서 올 수는 있는 곳이다. 빵은 오히려 서촌에서 먹는 것이 훨씬 더 감성의 맛을 더 할 듯하다.

인왕산 자락에서 바라 본, 옥인동 서촌한옥마을


부암동을 통해 ‘세검정’으로 내려오니 다시 익숙한 길이 나온다. 두 달 전, 나는 정릉까지 걸어가서 북악스카이웨이 그리고 백사실계곡을 통해 세검정으로 내려온적이 있다. 그 놀라운 기억과 기록을 잊지 못한다.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꼭 소개하고픈 길이다(결국 나는 이 코스를 나중에 회사 지인들에게 소개하고, 인도하게 된다. 그리고는 엄청난 칭찬을 받게 된다)

FW #34. 정릉동 편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다. 하늘은 다시 구름으로 잿빛이다. 봄의 향기가 완연해지려면 앞으로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듯싶다. 진짜 봄의 서촌과 인왕산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부암동을 통해 서대문 그리고 다시 아현동으로, 지나왔던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그 한나절이 꿈을 꾼 듯, 서촌의 향기로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 끝


<mapogundal’s photo, 돌아가는 길>


마포  > 충정로 > 정동길  > 인사동 > 경복궁 > 서촌한옥마을 > 수성동계곡 > 부암동  > 독립문 > 아현동 > 마포로 이어지는 총 20.51km, 25,567 걸음
이전 25화 FW #39, 북가좌동(22.37k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