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꽃밭에는 꽃이 핀다

어린 시선

by 정온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기 전, 마을 아랫동네에서 윗동네로 이사 왔다. 신작로 아래에 할아버지가 손수 지으신 집은 큰채와 아래채로 나뉘었고, 오른편에는 집만 한 텃밭과 그 아래 논 하나가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장남이 아닌 아버지를 택한 건, 할머니를 일찍 여의고 혼자가 되신 할아버지께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으셨기 때문이었다.


일곱 살, 국민학교 1학년. 1월생이라 또래보다 일찍 학교에 들어간 나는,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작은 골목 앞에서 늘 기다리던 고양이 '나비'를 만났다. 나비가 나를 반기는 하루는 어린 시절의 큰 행복이었다.


파란 철 대문을 삐걱 열고 들어서면, 왼쪽에는 작은 꽃밭이 숨 쉬고 있었다. 화려한 정원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정성껏 가꾼 작은 세상이었다. 할아버지가 심어 놓으신 대추나무 아래,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 참나리가 서로 빛을 뽐내며 노래하듯 피어났다. 높다란 돌담 곁에는 접시꽃들이 방긋 웃으며 파수꾼처럼 서 있었다. 그 옆으로는 도랑이 졸졸 흘렀고, 엄마가 어디서 가져온 금잔디는 햇빛을 머금고 줄기마다 금빛 보석을 박아놓은 듯 반짝였다.

여름이면 작은 도랑 위에는 소금쟁이들이 한가로이 노닐었고, 빨랫줄에는 삼베와 모시 저고리가 펄럭였다. 땀 흘리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 물가에서 시원하게 등목을 하셨다.


안청(마루방)의 문을 걷어 올려 처마에 걸어두면, 막혀 있던 마루가 어느새 탁 트인 대청마루로 바뀌었다. 뒤안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가득 스며들어 마루에 몸을 눕히면 그곳은 무릉도원처럼 시원했다.


시장에서 사 온 아이 머리보다 큰 수박은 담장 아래 도랑물에 몸을 담갔고, 텃밭에서 따온 오이도 같이 시원한 물에 몸을 식혔다. 꽃밭과 도랑은 그렇게 우리의 여름날을 식히고 품어주었다. 수도가 들어선 뒤에도 마당 한편 도랑은 늘 우리 집의 배경음악이 되었다. 그 물가는 더 많은 꽃들로 채워졌고, 간간이 허드렛물을 쓰는 곳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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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꽃이 붉게 피면 엄마는 백반을 반죽해 언니와 내 손톱에 얹어 주었고, 봉숭아 잎으로 돌돌 말아 재봉실로 묶어주셨다. 밤새 뒤척이다 보면 반죽이 빠져 흩어지기도 했고,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에 봉숭아 물이 들기도 했다. 가끔은 윗집 미경이 언니가 와서 함께 물들여 주기도 했는데 "봉숭아 물이 크리스마스까지 가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해줬다. 어린 우리는 그 뜻도 모른 채 그저 크리스마스까지 손톱에 물든 꽃물을 고이 지켜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물가에 앉아 놀곤 했다. 금빛으로 반짝이던 금잔디를 만져보고, 소금쟁이가 일으킨 동그라미 물결을 바라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봉숭아꽃 그림자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꽃 이름을 잘 알던 친구 순이는 채송화를 특히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설탕이 귀해 사카린으로 음식을 만들던 시절, 부엌 구석에 설탕이 통째로 담겨 있는 걸 발견했다. 정지(부엌)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고 숨어서 귀하던 설탕을 친구들과 한 숟가락씩 퍼먹었다. 그 단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몇 번이고 어둠 속에서 몰래 설탕을 나누어 먹으며 깔깔 웃었는데, 엄마는 설탕이 줄어든 걸 알고도 모르는 척하셨을까. "얘들아, 그때 그 설탕 맛있었지?" 지금도 문득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이지만, 내 마음속 꽃밭의 주인은 언제나 소금쟁이다. 물 위를 미끄러지던 그 작은 생명체가, 그 시절의 여름을 여전히 지켜주는 듯하다. 나는 어린 날의 바람처럼, 그 풍경을 오늘도 마음속에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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