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했던 겨울
고요한 새벽,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바닷가에는 부지런한 삶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멀리서 어렴풋이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고, 가까이에서는 엔진 소리가 요란하다. 여명이 밝아오자 부산한 목소리들이 출발을 알리고, 오색 깃발을 실은 어선들이 만선의 꿈을 품고 하나둘 떠난다. 삶의 터전인 바다로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에는 묵묵한 다짐과 하루를 향한 희망이 서려 있었다.
파도가 잠잠해진 오후, 물때에 맞춰 어촌계에서는 해산물 채취를 위한 바래에 나선다. 아낙네들을 배에 태우고 마을 앞산 바다를 돌아 조그만 돌섬에 내려주면, 아낙네들은 물살에 몸을 맡긴 채 톳을 캔다. 갯바위 근처에서는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메아리치고, 검은 잠수복에 의지해 차가운 바닷속으로 깊숙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해삼이나 전복 등을 건져 올린다. 거친 숨소리 속에는 바다와 함께한 세월이 깊이 배어 있었다.
바래가 없는 날이면 바닷바람에 단맛을 입고 자란 섬초(시금치)를 캤다. 맛이 좋아 유명한 특산물이었지만, 학교 다니던 시절 가장 하기 싫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수매철의 시금치 캐기와 시금치 개리는(다듬는) 일이었다.
해 질 녘, 저녁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지면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어부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배가 목넘이를 돌아 들어서면 배에 달린 깃발만 봐도 만선 여부를 알 수 있었다. 만선을 이룬 배에는 삼색기가 높이 펄럭였고, 고단한 파도와 싸워 이기고 온 장수처럼 유행가를 크게 틀어 울리며 당당히 선창으로 들어왔다. 선창가에는 매일 활어차가 대기했고, 갓 잡은 싱싱한 물메기들이 갑판에 한가득이었다. 심부름 나온 아이들은 물동이에 메기를 담아 어르신들 댁으로 나르며 '반찬 하세요' 하고 재잘거렸다. 아낙네들은 어느 집 배가 더 많이 잡았는지 궁금해 이야기 꽃으로 이내 선창가는 시끌벅적했다.
겨울 동안 잡아온 생선은 대부분 판매하여 계절이 끝나면 수익을 나눴다. 선장과 기관장 몫이 먼저였고, 그다음이 뱃사람들 몫으로 나눴다. 값어치 있는 고기만 판매용으로 두었고, 너무 많이 잡힌 날이면 뱃사람들 집으로 가져가 말려두고 팔아 생활에 보탰다. 그 덕분에 바닷가 마을은 겨울에도 늘 활기가 넘쳤다.
선창가 바로 옆 외갓집 마당에는 모닥불을 피워 뜨거운 물을 끓였다. 갓 잡아온 물메기를 손질할 채비를 하는 것이다. 고무장갑에 면장갑까지 껴도 손이 시렸고,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대야에 부어놓으면 시린 손을 연신 담갔다. 아낙네들이 우르르 둘러앉아 생선을 손질하다가도, 양이 너무 많은 날이면 아이들도 작은 손을 보탰다. 모두의 손길이 바쁜 동안, 동네 고양이마저 신이 난 눈빛이었다. 누군가 물메기 한 마리 던져주길 기대하며 꼬리를 살랑였다. 거친 바다와 싸워 얻어낸 삶의 흔적은 그들의 굵은 손마디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높은 파도와 추위와 싸운 남자들은 대병 소주를 부어 마시며 긴 겨울밤 추위를 녹였다. 갓 잡아온 물메기 회를 뜨고 붉은 초장에 스윽 한 입 넣어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이곳 바닷가 사람들에게 바다는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공간이 아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앗아갈 듯 무섭지만, 때로는 한없이 풍요로운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그 시절,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은 이렇듯 거친 바다와 맞서며 추운 바닷바람을 버텨냈다. 그 고생의 세월은 남았지만, 돌이켜보면 누구보다 따뜻하고 강인했던 겨울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도 바다처럼 깊고 넓게 계속된다.
*바래(해산물 채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