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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14. 2021

그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설 같은 이야기

일요일 밤엔 몸이 유달리 무겁다. 그럼에도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마음은 저만치 멀리서 관망 중이었다. 대체 누가 먼저인가. 서로를 책망하고 탓을 하고 미뤘다. 참다 참다 몸이 먼저 눅눅해진 자신을 쩍 달라붙은 바닥에서 분리시켰다. 마음도 못 이긴 채 겨우겨우 따라나섰다.


작은 베란다로 이동했다. 재활용 더미를 박스에서 꺼내니 혼잣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귀찮아, 내일로 미루는 게 좋을까’ 어둠 한 구석에서 망령이 대신 대답을 툭 던졌다. ‘내일은 귀찮지 않을 자신 있어?’ 마음도 몸도 자신 없었다. 퉁명스럽게 거칠게 플라스틱과 종이를 분리해냈다. 한 손으로는 비닐봉지를 나머지 한 손으로는 신문지, 우유팩, 광고전단지가 든 박스를 겨우 들었다. 한 손이 바닥으로 자꾸만 꺼졌다. 허벅지를 들어 올려 박스 아래쪽을 툭 차 버렸다.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박스에 담긴 온갖 폐지들이 조각조각 흩어져서 베란다 바닥에서 홍수를 이뤘다. 내 마음속에선 짜증이 범람했다. 수습, 그래 수습이 필요했다. 지금 베란다에 쏟아진 온갖 부유물들처럼 내 마음에도 쓸데없는 것들이 가득했다. 내다 버리자. 몸이건 마음이건, 폐지건 쓸모없는 것들은 마땅히 버려져야 했다. 하지만 극심한 피곤함이 대신 밀려왔다. 일요일 밤이었다. 피곤한 밤이었다. 움직이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하지만 폐지는 바닥에서 웃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한 손으로 그러모았다. 끌어 모으고 힘겹게 주워 올렸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 다시 쌓아 올렸다. 차분하게 성을 쌓듯이 박스와 비닐봉지를 잘 묶어서 세워놓았다. 바깥은 영하 20도, 한파가 닥쳤다. 또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 풍요롭고도 안락한 공간에서 잠시 벗어나, 고통을 배워야 했다. 내 신체를 고통을 경험할 때마다 성장하는 것 같았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 업적을 쌓고 내일을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고통은 나에게 부정적인 수단이 아닌 삶의 윤활유가 아닌가.


내 키만 한, 롱 패딩을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손목 끝까지 장갑을 끼워 넣고 가벼운 슬리퍼를 신었다.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내 발은 안전함에서 소외됐다. 추위는 현실이고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고통도 현실일 테니까. 현관을 부드럽게 열었다. 집안과 다르게 생긴 공기가 매섭게 얼굴에서 목으로 파고들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다. 내 힘과는 다른 세계의 힘을 느껴보자.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 적당한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하루 동안 때를 기다렸는데, 모든 기다림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 아닌가. 그래서 좋다, 암흑이 가득하다. 검정의 세상, 그 누구도 반겨하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완벽하게 감춰질 수 있을 것이다. 계단으로 몸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아래쪽으로 몸을 조심스럽게 밀어붙였다.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도 그곳엔 거의 속하지 않았다. 박스 하나 비닐봉지 두 개가 손가락 끝에서 덜커덩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검은 소리였다. 부스럭거리거나 둔탁한 소리를 질렀지만 소리는 작게 바닥으로 꺼졌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러다 순간, 안경을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이 몰려들었다. 


이곳은 어쩌면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그럼에도 나는 앞을 분간할 수 있는 사람처럼 계단이 존재할 거라 예상되는 곳에서 슬리퍼로 바닥을 체감하며 한 걸음 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하나 밟으면 계단 또 하나가 사라졌다. 앞쪽에도 뒤쪽에도 계단은 연속적으로 존재했다. 나는 계속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끝도 없이 멘틀을 향해 진입해야 할 운명을 가진 검은 사내처럼 나는 밑으로 계속 꺼졌다. 그럴수록 나는 더 깊은 어둠 속에 거주하는 인간의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안전할 필요가 있었다. 내 몸도 마음도 이 지구 위에서 계속 안정감을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위에서 아래로, 차원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도 그 차원 바깥의 세계에서도 계속 안전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피곤함을 느꼈다. 얼마나 내려갔는지 몇 층으로 진입했는지 그 어떠한 기류도 느낌도 감지할 수 없었으니까. 단지 내려간다는 것, 그 명제 하나에만 충실할 뿐이었으니까.


그때, 어젯밤 꿈속의 현자가 생각났다. 요즘 들어,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그 순간, 그러니까 어둠과 내 분신이 서로 구분될 수 없을 정도가 된 순간에 나는 꿈속의 현자를 기억해냈다. 그는 지구의 멘틀 중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산다고 말했다. 누구나 생각하는 상식적으로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그 현자는 자신이 지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멘틀 깊숙한 곳에서 머무른다고 말했다. 현자는 하필이면 왜 멘틀에서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 극심한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인지 나의 이해 범주로는 해석이 불가능했지만, 현자는 늘 그렇든 인간의 상상과는 먼 곳으로 분리되어있지 않은가. 그러니 논리적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나 또한 멘틀로 내려가는 중이다. 11층에서 1층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러니까 내 모자란 시력을 보조하는 안경 자체도 무의미해진 이 몹쓸 공간에서 나는 바닥을 향해 내려가는 중이다. 하지만 바닥은 내려가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더 시간을 소모하고 몸의 노력이 필요할지 예측할 수 없지만, 나는 작은 빛이 나타날 때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하지만 나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삶은 늘 안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가끔 변칙적인 불행이 닥치지 않는가. 아니, 이것은 불행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단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도중이 아니었나. 이것을 불행하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나를 불행한 삶으로 견인하는 게 아닌가. 그런 것은 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계단 끝 모서리 후미진 곳에 버려져야 한다. 멘틀이든 어디든 버려져야 한다.


나는 갑자기 이 계단에서 구르면 어떻게 될까 상상했다. 낙석처럼 위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그러면 무언가와 충동할 것이다. 내가 아닌 세상의 힘을 느껴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느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나는 체념해야 했다. 망상과 낙담이 공중에서 떠다녔다. 불빛을 향해서 내려가는 가운데, 나는 현자를 소환했고 불행해질지도 모르는 어떤 미래까지 소환했다. 하지만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은 상상 속에서 거주 중이었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불규칙적이었지만 비교적 안전했다.


1층에 도착하여 재활용 쓰레기를 쏟아버렸다. 그것들은 신음하는 듯 바람에 쓸려갔다. 또다시 극심한 피곤함이 쏟아졌다. 이제 다시 올라가야 했다. 여전히 세상엔 불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믿었던 사실이 과연 사실이라 어떻게 규명할 수 있는가. 내 눈으로 목격한 것들이 실존한다고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나는 그 말 때문에 안정감을 잃어버릴 듯했다. 


1층으로 진입하다, 어떤 사내를 만났다. 그 사내를 침을 튀겨가며 자신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었노라고 항변했다. 거칠게 문을 열고 나왔다며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었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 사내는 불과 1분 전과 다르게 현재는 안전했다. 나는 그 사내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 머물렀다니, 그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단 말인가. 그는 두터운 헬멧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배달을 다녀야 한다며 어둠 속으로 급속히 사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 과연 그가 실존했는지, 그 사실조차 거짓이 된 것 같았다.


나는 1층에서 11층까지 이번에는 반대로 멘틀에서 지상으로 구출될 사람처럼 계속 올라갔다. 심장의 박동이 강해졌다. 그렇게 되니 내가 더 강해질 것 같은 느낌이 당도했다. 





문학 탐구 모임을 열면서 아주 짧은 단편 소설을 써 봤습니다. 6개월 동안 6권의 문학 작품을 읽는 모임, 함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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