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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14. 2018

철판을 깐 '새치기'와 철판에 쓰여진 '차례 지키기'

‘나 혼자라면 문제없겠지’라는 생각이 삶의 균열을 일으킨다.

 암사역 4번 출구 앞에서는 아침마다 씁쓸한 광경이 펼쳐진다. 직장인들을 잔뜩 실은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면 김밥 옆구리가 터지듯 속살들이 밀려 나온다. 4번 출구에는 내려가고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줄을 지어 내려갈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차례는 버금 차次와 법식 예例를 쓴다. ‘순서 있게 구분하여 벌려 나가는 관계,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게 돌아오는 기회’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차례 지키기는 아침 시간의 직장인이 지켜야 할 첫 번째 규율이다. 앞사람이 에스켈리이터 앞에 줄을 서면 뒷 사람이 순서대로 아래로 내려가는 암묵적인 질서 말이다. 


 내가 씁쓸하다고 말했던 이유는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무불별한 ‘새치기’ 때문이다. ‘새치기’란 ‘순서를 어기고 남의 자리에 슬며시 끼어드는 행위’를 말한다. 몇 달 동안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지켜보았지만, 반대편 줄 끝으로 이동하는 사람은 백 명 중의 한 사람 정도였다. 한 사람이 차례를 무너뜨리니 뒤의 사람들도 마음 편하게 새치기를 했다. 무엇보다 짜증나는 것은 새치기하는 사람의 뻔뻔한 얼굴이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기다란 행렬을 보고서도 몰염치한 사람들은 ‘새치기’를 반복했다. 새치기를 선택한 사람은 남들보다 몇 발자국은 앞서갈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양심은 길가에 무참히 버려지고 말았다.



 한두 사람이 규칙을 깨니, 연달아 질서가 무너지는 장면이 이어졌다. ‘나 한 사람 정도야 뭐 괜찮지 않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이 비양심적인 행동을 유발한다. 단순한 생각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새치기도 물론 개인인 선택하는 자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유라는 명목으로 주어진 권리가 타인에게 피해를 안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내 것을 빼앗는 자’들의 행태를 가만히 지켜봐야 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바보가 되고 규율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똑똑한 취급을 받는 희한한 물결이 지속됐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얌체족들의 행태는 지하철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스크린도어가 열리자마자 앞사람을 밀치고 달려드는 사람, 빈자리에 앉으려는 틈에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가죽 가방, 새치기는 사람과 사물을 막론하고 펼쳐지지만 대안은 사실상 없다. 


 오래전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식사를 마친 후, 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정수기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내 순서가 되었을 때 갑자기 옆에서 아저씨 한 분이 새치기를 했다. 언짢았던 나는 쓴소리를 내뱉었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 많은데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오히려 더 큰 화를 냈다. '새치기를 할 수도 있지 사람 많은 데서 어린놈이 별소리를 다한다'는 적반하장의 태도였다. 어린 사람은 잘못한 사람에 대하여 정당한 말을 못 하는 것이냐며,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창피한 줄 알라고 했으나, 그 아저씨는 자신이 벌인 짓의 잘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더 크게 삿대질을 하고 큰 소리를 치면 자신의 잘못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주위 사람들이 말려 사건이 무마되었으나, 때로 바른 소리를 해봤자 그런 소리도 먹힐 사람에게만 통한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멀리 줄 끝으로 이동하여 순서를 기다리는 행동이 다소 귀찮다는 건 안다. 끼어드는 사람에게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면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출근 시간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기다리며 질서를 지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기다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질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존중한다면 새치기는 하면 안 되지 않을까? 



 더 큰 문제는 그 순간에 끼어들기 하는 사람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속으로 답답해하며 분노만 삭이고 있었을 뿐, 시원한 말 한마디조차 쏘아대지 못했다. 아침부터 거친 단어가 오고 갈지도 모르는 분란에서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 속사정이었다. 가끔은 법률 조항을 그들에게 외치고 싶기도 하다. 실제 경범죄 조항에는 공공장소에서 승차, 승선, 입장을 위한 행렬에 새치기나 떠밀기를 하여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에게는 10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에 처할 수 있다고 정의되어 있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작은 질서부터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말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관습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그 약속은 어른으로서의 간단한 소양을 요구할 뿐이다. 화가 나지만, 그 짜증스러운 장면도 곧 잊어버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기도 하다. 어디, 질서 무너지는 광경이 아침의 지하철역뿐이겠는가. ‘나 혼자라면 문제없겠지’, ‘하찮은 일인데 뭐’ 와 같이 우습게 여기는 일에서부터 삶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만 명심하자. ‘새치기, 끼어들기, 뺏기, 제치기’와 같이 타인과의 약속을 무너뜨리는 무례함보다는 ‘차례 지키기, 기다리기, 참기’처럼 예의부터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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