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겪어야 관계도 개선된다.
‘며느리’는 ‘아들의 아내를 일컫는 친족 용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한자어로는 자부子婦라고 쓴다. 일부는 며느리의 뜻이 아들에게 기생하는 여자라고 주장하지만 정설은 아니다. 기생한다는 뜻의 며느리는 근래에 생겨난 말이다. 중세 국어에서는 ‘며날 + 이’로 기록된 것이 발견되었으나 단어를 구성하는 형태소에 대하여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서정범 교수는 ‘며날’은 모두 사람이라는 뜻으로 며날이 며늘, 며느리로 진화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며느리의 뜻이 부정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그만큼 시어머니에게 당하기만 했던 며느리의 부당한 역사를 증명하는 건 아닐까?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에서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상극이다.
모든 며느리가 처음부터 시어머니와 관계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다. 원래 며느리가 될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그의 시어머니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바라보는 시선에 간극이 있다는 것을 며느리만 몰랐다. 한쪽은 슈퍼갑의 위치고 다른 반대편은 을이라는 현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 모든 고부갈등의 출발이라면 과연 그것을 비약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한국에는 며느리를 일꾼으로 대하는 전통이 있다. 시어머니에게는 그 사상이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런 사상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마당에 새 식구를 향한 마음이 처음부터 순수했을까?
내가 이런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리고 있지만, 그 상황은 내가 경험했고 주변에서도 쉽게 접하는 흔하디흔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보통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남자 집에 여자가 인사하러 오는 첫날을 그려본다. 아직 며느리 신분이 아닌 여자는 전적으로 남자 집안에서 귀중한 손님이다. 손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까? 한국의 전통적인 손님을 대하는 문화를 떠올리지 않아도 손님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는 초등학생도 안다. 그런데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예의란 것은 단 몇 분 만에 허물어진다. 여자는 점점 마음이 불안해진다. 가만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과일과 농담을 곁들여도 되는지 좌불안석이 된다. 여자는 그런 스트레스를 그저 견디기만 해야 하는 방식으로 진화된 것일까? 무책임한 대답이다. 남자는 여자의 어머님이 차려주었던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환대를 잊는다.
차를 마시던 단란한 풍경이 끝나면, 곧 부담스러운 그림자가 덮친다. 일어나서 설거지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당장 팔을 걷어붙이고 싱크대 앞으로 나서야 할 것 같다. “어머니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와 같은 말과 “아니야, 앉아 있어.”라는 영혼 없는 말을 주고받지만,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곧 시어머니 쪽에서 실토하고 만다. “그래? 그럴래.”와 같은 말과 함께 주도권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강심장이라면 장차 벌어질 시월드의 주도권 싸움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말이다. 장차 며느리가 될 여자는 이 상황을 잠자코 받아들여야 한다. 큼지막한 고구마 한 개를 목구멍으로 삼켜가며 말이다. 자, 며느리는 이제 주도권을 빼앗겼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어떤 불리한 말이 며느리에게 향하게 될까? 얼마나 많은 억울한 일이 펼쳐질 것이며, 얼마나 많은 양보를 하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미안하지만, 나 역시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의 희생을 방관하던 시절이 있었다. “명절 일 년에 기껏 며칠에 불과하잖아. 참아주면 안 될까?” 이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며 말이다. 그래, 입장을 바꿔서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이 남자라면, 만약 군대를 갔다 왔다면 말이다. 일 년에 단 며칠뿐이라도 그곳을 다시 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웃으면서 “그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예는 과장이 아니다. 남자는 군대를 벗어나도 가끔 그곳으로 돌아가는 악몽을 꾼다. 꿈에서 깨어나도 그 상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며느리에게 그런 날을 정기적으로 겪어야 한다고, 며칠만 참으면 안 되겠냐고 말한다면 여자는 무조건 긍정해야 할까. “그래 걱정 마, 단 며칠인데 뭐 괜찮아.”라고 말하는 아내가 있다면, 그녀는 천사다. 평생 복종하면서 떠받치고 살아야 한다. 그만큼 그녀는 고통스럽지만,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가정을 지키고 싶기에 그저 참고 있을 뿐이다.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으면서도….
보통은 며느리를 딸로 생각하지 않는, 어쩌면 일꾼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에서 악몽이 시작된 걸지도 모른다. 며느리도 어느 집안의 귀한 자식이다. 분위기 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낯선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 험한 꼴을 보고도 그것을 감내해야만 할까? 고통스러운 것을 단지 을의 입장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야 할까? ‘며느리 늙어 시어미 된다’, 라는 속담이 있다. 과거에 시어머니에게 당했던 고통은 며느리에게 다시 못된 시어머니라는 반복을 안길 뿐이다. 중간의 위치에서 방관만 했던 남편은 반성해야 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의 선을 넘지 않도록 중재해야 한다.
오래된 시스템을 바꾼다는 것은 갈등을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갈등을 겪어야 관계도 개선될 수 있다. 당신의 아내가 언젠가 또다시 며느리를 조종하는 갑으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하여 이 땅의 모든 불성실한 남편은 반성하자. 명절에 전이라도 꼭 부쳐주겠다고 떠들어놓고 안방에 들어가 낮잠이나 자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는 않았는지. 시어머니가 아내에게 던지는 막말을 못 들은 척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며느리도 가족이다. 한 명을 타깃으로 지정하여 책임감을 강요하는 것은 가족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대접을 받으려고 며느리를 맞겠다는 생각도 가족을 대하는 방식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라도 아내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야 한다. 온갖 핍박과 시어머니로부터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서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