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이 땅바닥에 곤두박질친 것은 마음에 돋친 가시 때문이었다. 멀쩡한 시가 가시에 찔려 바닥에 나뒹구는 것이 거센 바람이 불어와 잎새가 뜯긴 겨울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눈을 질끈 감아야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인내심으로 장착해야 하는 거라면 사랑일 수 없다고, 교과서 같은 가르침은 사랑에 지치고 시달린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시가 음미가 아닌 왜곡되고 있었다.
'할 만큼 다 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도 할 만큼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럴까.
어느 순간 내가 할 만큼 다 했다는 것과 상대방이 느끼는 것의 간극이 보았다. '할 만큼 다 했다'는 것을 측량하는 장치는 나의 잣대일 뿐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는 노릇. 내 측량도구로 가늠해 보고 결론을 내는 것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찔했다. 애당초 내가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이 고마울 정도다. 결국 측정불가한 일에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한 셈이다.
왜 내가 '할 만큼 다했다'라고 여긴 걸까.
그건 지쳤다는 뜻이겠지. 심사가 복잡하면 왜곡해서 듣고 자기 식대로 해석해 버리게 되니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그렇게까지 지칠일이 아닌 건데. 충분히 이해되지 않더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데. 삶의 어려움 앞에 토 달지 않고 시비하지 않는 게 중요한데 어쩌다 시를 두고 시비를 했는지, 참!
더 깊이 사랑하라는 시는 가시 돋친 마음으로는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친구 수녀가 건네준 시집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한동안 음미했더랬는데, 한참 뒤에야 안 것은 나에게 필요한 詩라서 나한테 찾아온 것이라는 점이다.
뾰족한 마음이라 처음에는 반발심으로 읽었는데 마음이 고요해지자 詩가 바닥에 곤두박질치지 않고 아침햇살 퍼지듯 마음속으로 번진다.
당장은 힘들더라고도 이렇게 해보라고, 이렇게 하면 상대방을 깊이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자 '사랑하십시오'라는 말도 딱딱한 당부가 아닌 부드럽게 권하는 말로 들리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