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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임문화포럼 Aug 27. 2020

게임으로 성장하는 호모 루덴스

2020 게임문화포럼 칼럼시리즈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순기능2. 김상균 위원 편 ㅣ


놀이에 관한 죄의식


A는 직장에 다니는 학부형인데, 거의 매일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야근을 하고 있습니다.
B는 대학생인데, 여섯 시간째 책상을 떠나지 않고 전공 서적을 읽고 있습니다.
C는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인데, 하루 중 1~2시간 정도 휴식하며 그 시간에는 거의 매번 게임을 즐깁니다.

이 셋 중 누가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A는 일을 B는 공부를 과하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C에 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혹시 학부모 입장의 분이 이 글을 읽는다면 매일 게임을 즐기는 C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답하실 듯합니다. 제가 강연장, 상담에서 만났던 대부분 학부모가 그랬습니다. C에 관해 두 가지 문제를 얘기하십니다. 고등학교 학생인데 하루에 1~2시간을 쉰다는 점, 그리고 매일 게임을 한다는 점이 잘못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고등학생은 하루에 몇 시간을 쉬는 게 좋을까요? 그리고 우리 아이가 쉴 때 무엇을 즐기면 적절할까요? 아이들보다 자제력, 인내심이 뛰어난 성인도 하루에 최소 3~4시간 이상은 긴장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쉬지 않고 무한정 달릴 수 있는 인간, 스트레스로 받은 상처를 회복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1~2시간의 휴식,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혹시 아이가 책을 읽거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 쉬기를 바라신다면, 공부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그게 적절할지 한 번 더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에서 쉼과 놀이는 죄의식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과도한 일과 무리한 학습을 미덕으로 바라보는 시대입니다. 놀이, 특히 게임을 하면서 노는 것을 시간 낭비, 하류 문화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에게 놀이, 게임이 왜 필요한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놀아야 생존하는 인류


공부, 학습, 교육, 학교, 강의실, 이런 단어를 들으면 당신은 주로 어떤 감정이 떠오르나요?

일, 회사, 프로젝트, 업무 보고, 인사고과, 이런 단어를 들으면 당신은 주로 어떤 감정이 떠오르나요?

두 질문 각각에 관해 다음 네 개의 보기 중에서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골라보시기 바랍니다. 

1) 활기찬, 흥분된, 행복한, 즐거운
2) 활기찬, 날카로운, 속상한, 불쾌한
3) 무기력한, 지친, 우울한, 불쾌한
4) 무기력한, 평온한, 자족한, 즐거운

당신이 1번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학습이나 일을 긍정적으로 몰입해서 즐기는 상황입니다. 2번은 열심히는 하고 있으나 지속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정신 에너지를 소모하는 상황이며, 3번은 이미 지쳐서 탈진(burnout)한 상태이고, 4번은 최소한의 것만 해내면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는 모습입니다(Russell, 2003). 2, 3, 4에 있는 우리를 1로 옮겨줄 수단이 바로 쉼, 놀이, 그리고 게임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후에도 놀이나 게임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제가 만나본 분들 중에는 인류의 역사에서 놀이나 게임이 주요 요소로 다뤄진 경우가 드물어서 게임을 가치 있는 문화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 TV강연 프로그램에서 접했던 역사에서 놀이나 게임이 다뤄진 경우가 거의 없기에 그렇습니다. 짧은 지면에 많은 얘기를 담기는 어려우니, 역사의 주요 장면에 등장하는 놀이, 특히 게임을 몇 가지만 소개해보겠습니다. 


[사진] 인류 최초의 게임 (출처: Gianni Dagli Orti, Corbis)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게임이 무엇인지는 문헌마다 조금 다른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집트 벽화에 등장하는 보드게임을 시초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대략 기원전 3,500년경입니다. 동물의 뼈를 깎아 만든 아스트라갈리라는 주사위로 다양한 보드게임을 즐겼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게임을 이기기 위한 운을 신이 준다고 생각해서, 게임에서 이긴 사람은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으며, 게임도구를 무덤에 다른 부장품과 함께 안치하기도 했습니다(김상균, 2017). 여러 문명에서 보드게임은 상류층의 주요 놀이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림] (왼)수학자 파스칼,  (오)승경도를 즐기는 양반들(출처: thocp.net, 김준근."기산풍속도첩", 독일 함부르크민속박물관)


17세기 수학자 파스칼이 확률론을 연구하게 된 배경에도 게임이 있습니다. 게임을 즐기던 프랑스 귀족 앙투안공보는 게임을 플레이하다가 중지한 경우, 게임의 결과를 어떻게 계산할 수 있는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파스칼에게 점수분배 문제(problem of points)에 관한 연구를 의뢰합니다. 파스칼은 현대 정수론의 창시자로 유명한 수학자 페르마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점수분배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확률론의 기초를 정립합니다. 보험을 비롯해 다양한 현대 금융상품의 핵심요소인 확률의 태동에 게임이 결정적 기여 했습니다(Johnson, 2017)

조선 시대에는 승경도(陞卿圖)라는 인생 게임이 유행했습니다. 하륜이 창안한 게임으로 알려진 승경도는 조선 시대의 수많은 관직 종류와 등급을 배우기 위한 교육용 보드게임 역할을 했습니다. 승경도에서 파생된 게임으로는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사가에서 머무는 동안 조카들을 교육하기 위해 고안한 규문수지여행지도(閨門須知女行之圖), 휴정대사가 불교의 108단계 윤회 과정을 빗대어 만든 성불도 게임이 있습니다게임에서 성공하면 성불하고실패하면 지옥에 떨어지거나 축생이 됩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

동서양의 여러 문화권에서 놀이게임은 역사의 여러 장면에서 중요하게 등장해왔습니다신의 뜻을 가늠하기 위한 수단새로운 지식을 태동시킨 불쏘시개사회생활과 삶의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이었습니다역사 속에 나타나는 게임은 우리에게 즐거운 경험배움과 성장의 동반자였습니다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네덜란드의 역사·문화학자인 요한 하위징아는 인류의 역사문화사회에서 놀이게임이 가진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생 인류를 놀이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 칭한 바 있습니다.


[사진] 요한 하위징아





놀이가 밀려난 현실


애석하게도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우리는 놀이, 게임과 멀어지게 됩니다. 산업 현장과 교실에서 인간이 느끼는 스트레스, 즐거움은 그 수행과정을 결정하는 주요 의사결정 요소에서 배제됩니다. 투여한 자원, 시간과 대비하여 얼마나 더 많이 생산할 것인가, 얼마나 더 많이 학습할 것인가에 집중하여 산업 현장과 교육 시스템이 정비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떨까요? 조사에 따르 직장인의 95.1%가 직장 생활 중 탈진(앞에서 언급한 3번 상태)을 경험했다고 응답했으며, 고등학교 교사 대상의 조사에서는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이 없는 교실이 7%에 불과하다고 나타났습니다(신승엽, 2019; 최원국, 2020). 탈진한 산업 현장, 잠든 교실 속 우리를 활기차고 즐거운 상태(앞에서 언급한 1번)로 이끌어줄, 유일하지는 않으나 효율적인 수단으로 게임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시점입니다. 





우리를 깨우는 놀이와 게임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를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업무와 학습에 지친 우리들을 위한 휴식 수단, 그 자체만으로 게임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시중에 유통되는 수많은 온라인 게임, 모바일 게임, 콘솔 게임, 보드게임을 놓고 일각에서는 그런 게임들이 기능적으로 특별한 효과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지능 개발에 도움이 되거나, 성적을 올리거나, 우울증 개선에 효과가 있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물론 그런 효과를 내는 게임들도 있으나, 게임은 기본적으로 그런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를 잊게 해주는 역할, 새로운 즐거움에 빠져들게 이끄는 역할, 현실과는 다른 독특한 경험을 전달해주는 역할, 그것만으로 게임은 훌륭한 휴식, 놀이의 수단이 됩니다. 

둘째, 목적한 기능, 특히 교육적 효과 향상에 도움을 주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게임들은 초중등, 대학, 성인, 기업 교육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초중등 교육 현장에서는 정규 교과목의 학습 성과 향상을 위한 목적, 학생들의 문제해결력, 소통능력, 리더십, 창의력 등을 향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게임이 활용되고 있습니다(김상균 외, 2020)

김무광 선생님의 사례를 보면 문제해결, 수학, 역사, 글쓰기 등의 교육을 위해 다양한 상용 보드게임을 기반으로 교안을 구성하여 수업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최은주 선생님은 사회, 역사 교육을 위해 직접 개발한 게임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삼국지, 어벤져스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콘텐츠의 이야기, 캐릭터를 일부 차용하여 아이들이 여러 수업 차시에 걸쳐서 롤플레잉 게임을 즐기면서 수업 내용을 학습하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조기성 선생님은 다양한 에듀테크 소프트웨어를 활용해서 아이들에게 게임 같은 학습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에듀테크 소프트웨어를 적절히 활용하여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들의 몰입감을 높여주는 요소인 포인트, 리더보드, 배지, 랜덤 선택 등을 수업 흐름에 맞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김기정 선생님은 포인트, 리더보드, 미션 등의 게임 요소를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적 도구를 통해 유연하게 구현하여, 아이들의 학습 과정을 게임처럼 만들고 있습니다. 교실 내 디지털 인프라가 취약한 상황에서 매우 효과적인 구성입니다.

문미경 선생님은 기업가정신 교육을 게임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 발견, 대안 설계, 해결책 구현까지의 여러 과정을 다양한 게임 플레이로 구성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인, 기업 교육에서 게임은 더 폭넓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SHRM의 발표에 따르면 포춘 500대 기업의 94%가 교육에 게임을 적용하고 있습니다(김상균, 2019). 직무와 관련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학습하는 수단으로, 창의적 사고력, 의사소통 능력, 리더십 등을 향상하는 수단으로, 조직 내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는 수단으로 게임이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글로벌 기업들은 게임적 경험을 구성원의 학습 과정 전반에 녹여 넣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성원 교육에 사용하는 온라인, 모바일 학습 플랫폼 자체에 게임의 포인트, 배지, 리더보드, 미션, 길드(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이 소규모로 모여서 활동하는 모임), 보상, 능력치 등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학습 경험 전반을 게임과 같은 플레이로 만드는 접근입니다.


[사진]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출처: Unsplash)





게임과 호모 루덴스


연령대별로 조금 차이가 있으나 우리나라 인구의 2/3 정도는 게임을 즐깁니다(한국콘텐츠진흥원, 2019). 게임만큼 다양한 연령대의 지지를 받는 놀이 수단은 드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초중등 교육 현장의 교사들은 왜 자신의 교실에 게임을 도입하며, 글로벌 기업들은 왜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며 구성원 교육을 게임처럼 바꾸고 있을까요?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합니다. 게임만큼 인간에게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재미와 몰입감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낮은 비용으로 구매가 가능한 것, 주변의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것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낮은 비용, 흔한 사용은 경제학적으로 희소성이 낮음을 의미하기에 거래상의 금전적 가치가 낮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래상의 금전적 가치가 그것의 본질적 가치를 반드시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깨진 벽돌 몇 조각, 나뭇잎 몇 개, 모래 한 줌으로 소꿉놀이를 즐겼고, 그런 롤플레잉을 통해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예습했습니다. 몇천 원으로 다운로드가 가능한 모바일 게임이라고 해서, 몇만 원으로 구매가 가능한 보드게임이라고 해서, 겉으로 보기에 그리 화려하지 않은 교육 게임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인류는 생각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더 깊게 만들고, 더 오래 이어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놀이가 필요합니다. 현대 인류에게 게임은 효율적 놀이의 정점입니다. 게임으로 세상을 즐겁게 플레이하며 성장하는 호모 루덴스가 되었으면 합니다.




참고문헌

김상균. (2017). 교육, 게임처럼 즐겨라. 홍릉과학출판사.
김상균. (2019). 가르치지 말고 플레이하라. 플랜비디자인.
김상균, 김무광, 최은주, 도기성, 김기정 & 문미경. (2020). 교실 게이미피케이션. 테크빌교육.  
신승엽. (2019. 1. 29.). 직장인 95% 번아웃 증후군 경험. 매일일보,
최원국. (2020. 5. 13.). 수업시간에 안자는 교실 초등 71%, 중등 21%, 고등 7%. 조선일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 7. 27.). Retrieved from http://encykorea.aks.ac.kr
한국콘텐츠진흥원. (2019). 2019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 한국콘텐츠진흥원.
Johnson, S. (2017). Wonderland: How Play Made the Modern World. Riverhead Books.
Russell, J.A. (2003). Core Affect and the Psychological Construction of Emotion. Psychological Review, 110, 145-172.





김상균

강원대학교 산업공학과 교수

2020년 게임문화포럼 투고분과 위원

2007~현재 강원대학교 교수

2019~현재 게임문화재단 이사

2018~현재 삼성인력개발원 자문교수

2019~현재 삼성청년소프트웨어아카데미 자문교수

2019~현재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자문교수

2019~현재 강원도인재개발원 자문교수

브런치 https://brunch.co.kr/@gam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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