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임문화포럼 Aug 20. 2020

책을 보드게임으로 만들기

장애 인식 개선 교육용 게임 <굿투고> 제작기

2020 게임문화포럼 칼럼시리즈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순기능1. 이민재 위원 편 ㅣ


[사진] 책<장애, 너는 누구니?> (출처: 산하출판사)



책을 보드게임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가방 들어주는 아이> 외에 무려 300여 권의 책을 집필하신 고정욱 작가님으로부터다. 산하 출판사에서 2012년 출간한 <장애, 너는 누구니?>라는 동화책을 교육용 보드게임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이었다. 수 년간 교육 내용을 기반으로 10여 종 이상의 다양한 게임을 만들었지만, 장애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시작하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 선봉에 고정욱 작가님이 계시다는 크나큰 안도와, 교육으로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조직의 미션을 등에 업고 시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장애인식개선 교육용 보드게임 <굿투고>가 세상에 탄생했으며, 3주간의 크라우드 펀딩(109명 참여, 4,723,000원 달성)도 성공하고, 덕분에 라디오 방송(KBS)에도 출연했다. 소셜임팩트 부문 수상(2019 e-마케팅 페어)의 영예도 누렸다. 


제작 과정의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차이와 차별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한 장애인식개선 교육(인성 교육) 현장에 굿투고가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책을 보드게임으로 만드는 이들의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것, 또 하나는 앞으로 장애를 주제로 하는 다양한 교육 콘텐츠가 등장하길 간절히 바라는 염원에서다. 이 글은 이론과 메커니즘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글은 아니다. 주요 단계 별 고민들과 그것을 해결한 결과들을 나열한 과정에 대한 기획자의 생생한 제작기다. 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각 단계별 키워드는 밑줄로 구분했다.


[사진] 여름에서 겨울, 고정욱 작가님과의 제작 회의 [출처:이민재]





"잘 만든 책이 있는데 굳이 왜 교육용 보드게임을 만들어야 하는가?


험난한 항해일지라도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면 표류가 아닌 것처럼, 방향성(기획 의도)을 만드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이를 위해 위 질문의 확실한 답이 필요했다. 논문과 기사, 인터뷰 등 여러 가지 자료를 찾고 분석했다. 다음은 글의 가독성을 위해 원문과 기사로 간단히 정리한 내용이다. 


[자료] 장애인복지법시행령 제16조<장애 인식개선 교육>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자료] 2019년 국민독서실태조사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시장분석 및 관련법령), 잘 만든 동화책일지라도 아이들이 읽지 않는다.(문제 상황) 이 책과 교육이 잘 연계될 수 있도록 교육용 보드게임이 필요하다.(해결 방안) 지금 보면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두 문장이지만, 이를 만들기 위해 사실, 몇 개월을 고심했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 먼저, 장애인식개선이라는 주어진 주제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비장애인으로서, 그리고 해당 주제의 비전문가로서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다. 우리가 느끼는 이유가 일반적인 것인지, 참고할 만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해외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초 개발이라는 슬로건을 양심의 가책 없이 쓸 수 있을 만큼, 게임으로 장애의 유형을 종합적으로 풀어내는 사례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좋게 말하면 시장 개척이지만, 사실 교과서 없이 시험 치는 꼴이다. 


우리 콘텐츠의 경쟁 우위를 파악하고 차별화 요소를 갖는 데에도 필요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전의 누군가의 것을 참고하고 분석하는 과정은 어쨌든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데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 *이 글의 작성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교육 콘텐츠 개발에서의 케이스 스터디의 시간은 마지막 결과물의 퀄리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 믿는 편이다.


 

[사진] 필자의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 메모 (출처:이민재)


주제만큼이나 어려운 관문이 하나 더 있었다. 제작의 방향이 책 <장애, 너는 누구니>를 바탕으로 한 2차 콘텐츠 제작이며 책의 대체제가 아닌 보완재의 게임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책을 게임으로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 그대로를 교육용 게임으로 설계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존재했다. 


책은 장애를 소재로 한 이야기 동화책이다. 한번 책을 펼치면 덮는 게 어려울 정도로 내러티브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하지만 모든 장애 유형 정보를 비롯한 인식개선에 필요한 내용이 종합적으로 포함되어있는 전문 도서가 아니기 때문에 교육모델, 학습목표 등 교육으로의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주인공 철민이의 메인 스토리 1개와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장애 유형별 9개의 에피소드의 액자식 전개로 구성되어있어 다양한 인물과 스토리가 존재한다. 그대로 활용하면 가장 좋겠지만 장애인복지법의 15가지 유형 분류를 비롯하여 보완해야 하는 내용을 위해 기한 내 추가적인 원고와 디자인 작업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새로운 맥락이 필요했다. 


[자료] 장애의 15가지 유형 분류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책의 이미지들은 스토리텔링에 무게를 싣는 훌륭한 일러스트이다. 어린이 동화 일러스트의 대가이신 윤정주 작가님의 작품이다. 동화 전개상 일품인 그림이지만, 많은 부분을 상징과 기호로 활용하는 게임의 디자인으로는  제한적인 부분이 있다.   

결국 기존 책의 구성과 디자인을 과감하게 놓는 계획이다. 때문에 새로운 콘셉트를 바탕으로 기존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동화와 게임의 상호, 보완적인 도구와 기능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림] <장애,너는 누구니?>책의 주인공 철민이와 유리 (출처: 산하출판사)


기존의 것의 해체부터 시작하여, 새롭게 만들 계획을 세우고 동시에 게임의 범위로 넘길 요소들을 파악하기로 했다.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지만 편집과 조합으로 짬짜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짬뽕을 가지고 짜장면으로 새로 만드는 격이다. 짬뽕 재료를 분석하고 동시에 짜장면을 만들 계획을 세운 다음, 국물에 담긴 면을 씻어, 여기에 짜장 소스를 붓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적고 보니 이 과정은 게임의 범위 설정과 전략 수립의 과정이었다. 


[사진] 플레이 테스트를 준비하는 연구원들 (출처:이민재)

결국 위의 두 가지 큰 난관을 수 십 차례의 회의와 자문, 지난한 플레이 테스트 과정들을 거쳐 내용과 구성과 구현 부분에서 아래와 같은 나름의 기준을 정립해나갔다. 





내용(Contents)


교육용 기능성 게임이다 보니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이며,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지식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게임화의 방법 또한 다양한데,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담으려는 주요 내용과 방법은 다음과 같다. 


플레이어들이  15가지 장애 유형을 여러 번 읽게 하거나, 수어 표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수어로 표현하게 하며 장애를 공부하도록 설계했다. 또한 퀴즈를 통해 장애와 관련된 상황과 대응을 제시하고 이게 올바른 행동인지 생각해 보는 기회도 부여했다. 이러한 선언적 지식 학습(declarative knowledge)을 통해 게임이 끝나고 나면 장애에 대해 몰랐던 개념을 인지하는 효과를 기대했다 


그뿐 아니라 절차적 지식 학습(Procedural knowledge) 부분도 고려했다. 플레이어들은 게임 중 불편함을 경험하는 미션을 수행하는데, 이때마다 장애인의 관점에서 평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의도하였다. 더불어 이때 다른 플레이어에게 도움을 받으면 수월하게 미션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도 다른 이의 장애에 관심을 기울이며 도움을 줘야 한다. 비장애인이 언젠가 장애를 가질 수 있다는 관점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누군가에게 베푸는 선의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경험을 게임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구성(Mechanism)


자칫 주제가 무겁고 어려울 수 있어 이를 해결하고자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요소가 많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이 중요하다. 그동안 다양한 교육용 콘텐츠를 만들었던 노하우와 실제 수업 현장에서의 교육을 진행하며 얻은 수많은 경험들이 중요한 감각으로 작용한다. 플레이 테스트로는 찾지 못한 문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경험하지 않은 경계까지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디테일을 만든다고 확신한다. 


팀원들과 구성에 대해 논의하며 세운 기준은 첫째, 플레이어들에게 다소 가깝지 않은 주제와 복잡해 보이는 방법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정보와 안내를 단순화시켜 이해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단순 플레이 외에 강의를 연계한 활동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시간과 장소의 특성, 수업의 형태, 그리고 참여자의 안전까지 생각하여 구성품의 종류와 퍼블리싱의 형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플레이 테스트를 거듭하며 알게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재미의 요소가 장애 교육의 몰입을 방해할 때가 있다. 더 나아가 부지불식간에 장애에 대한 조롱과 희화로 넘어갈 여지도 만들기 때문에 재미의 요소를 적절한 수준으로 조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즐거운 활동을 정리하고 교육적 의미로 마무리(wrap up)할 수 있는 게임의 자체적인 기능도 필요했다. 





구현(Design)


<굿투고>라는 타이틀 자체도 ‘GOOD'과 ‘GO’라는 단어를 합성한 것처럼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의미의 단어들을 선택했다. 물론 그 자체가 오히려 장애에 대한 그릇된 가치 판단을 심어줄 수 있어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이야말로 장애인식개선 교육, 결국 이 게임의 목적이기 때문에 밝은 인상과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각적으로는 곡선 처리와 두꺼운 드로잉으로 표현했으며, 직접적으로 장애를 표현하는 경우에는 최대한 세련된 기호 또는 유머의 장치들을 활용했다. 색채는 되도록 따뜻한 계열을 사용했다. 

 그리고 도서 연계 활용 방안을 고려하여 도서에서 게임으로, 또는 게임에서 도서의 순서로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사전 사후 활동 프로그램까지 설계하여 교안PPT도 무료로 제공했다. 아래 이미지가 이를 토대로 마침내 완성한 <굿투고>다.


[그림] <굿투고> 보드판과 주요 구성품 (출처:캠퍼스멘토)



교육용 게임 기획자로서 개인적으로 가장 떨리는 순간은 퍼블리싱이 완료된 결과물을 처음 마주할 때가 아니라, 유통이 시작된 이후에 그 게임을 누군가와 가볍게 플레이하는 순간이다. 아마도 서점에 유통되고 있는 책을 우연히 읽어보는 그 책의 편집자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숱한 자문과 검증 과정을 거쳤지만, 아쉬움은 어떻게든 발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굿투고는 언제든 패키지를 열어 누구와 플레이를 해도 그런 긴장감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기존에 없었던 장애인식교육용 게임의 탄생 자체가 큰 의미라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것을 시작으로 장애인식개선을 위한 다양한 교육용 게임들이 등장할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도 그 힘든 제작 과정 중에 있는 팀들을 응원하며 글을 맺는다.




마무리하며

                                                                         

[사진] 브랜던 메슈스의 사례(출처:PGATOUR 트위터 2019.11.19)
메이저대회 브리티시오픈 출전권이 걸린 이 대회에서 매슈스가 2.5m 거리의 버디 퍼트를 하려던 순간 갤러리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매슈스는 이 퍼트를 넣지 못했고 우승도 놓쳤다. 하지만 매슈스는 소리를 지른 사람이 다운증후군을 갖고 있고, 긴장했을 때 소리를 지르는 등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지적장애인 센터에서 일하셨던 그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매슈스는 경기가 끝난 뒤 소리를 지른 남자를 찾아 따뜻한 포옹을 했다. 


그렇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해는 개인과 그가 속한 사회의 품격을 만든다. <굿투고>게임이 부디 플레이하는 모든 이들에게  장애에 대한 관심의 시작을 불러일으키는 것 뿐 아니라 타이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모두에게 좋은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세운 슬로건대로 말이다. “즐기GO, 배우GO, 느끼고GO, 굿투고” 



[사진] 고정욱 작가님과 보드게임 제작 프로젝트를 기념하며  (출처:이민재)




이민재

교육용게임 개발자

2020년 게임문화포럼 투고분과 위원

[~2019.3] 게이미피케이션을 활용한 12차시 진로 교육 프로그램 개발_콘텐츠진흥원

[~2019.5] 기업가정신 레츠고 <기업가정신과 게이미피케이션>강의_아산나눔재단 

[~2020.3] 진로탄력성 교육용 게임 개발_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20] 교육용 게임 및 교육 도서 다수 제작

[~2020.5] 캠퍼스멘토 콘텐츠 본부장

[~2020.5] 즐거운교실문화연구소 소장

브런치 https://brunch.co.kr/@leeminjae








다른 위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서문_게임=게임,&다시보기 / 최정혜 고려사이버대학교 교수 CLICK

 1탄_교육용 보드게임 제작이야기 / 이민재 게임개발자 CLICK

 2탄_게임으로 학습하는 호모 루덴스 / 김상균 강원대학교 교수 CLICK

 3탄_게임에 빠진 아이 마음 들여다보기 / 방승호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관 CLICK

 4탄_컴퓨터게임을 활용한 인지재활 치료의 역사와 근거 / 김연희 삼성서울병원 교수  CLICK

 5탄_가상현실 게임을 통한 효과적인 인지기능 재활 / 김민영 CHA의과학대학교 교수 CLICK

 6탄_게임처럼 나의 배움 경험 디자인하기 / 최정혜 고려사이버대학교 교수 CLICK  





매거진의 이전글 게임 = 게임, & 다시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