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걸려온 병원 전화
꿀 같은 오프였다. 다섯 개의 이브닝(14시~22시까지의 근무)을 하고 찾아온 2일의 오프. 마지막 이브닝이 늦게 끝난 탓에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두 시였다. 그 덕에 첫 오프의 절반 이상은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다 끝이 났다. 그래도 '하루 더 오프니까~'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새벽까지 잠을 아껴가며 놀 계획이었다. 그런데 새벽 한 시 넘어 전화가 걸려 왔다. 이런... 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병원 전화였다. 퇴근 후 집에서 누워 있다 직장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본 모든 직장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 순간 마음속에선 폭풍이 휘몰아친다는 것을.
"이걸 받아 말아?..."
연차가 담력인가 보다. 연차가 낮은 나는 결국 새 가슴을 부여잡고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익숙하지만 여느 때 보단 다소 다정한 선임 선생님의 목소리. 그리고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병원에서 전화를 한다는 것은 주로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친 사고를 뒤늦게 발견하여 자초지종을 듣고 혼내기 위한 전화. 또는 이렇게 근무가 아닌 날 출근을 (요구 아닌) 부탁하기 위한 전화.
그렇게 난 5시간 뒤 출근이 결정되었고 부리나케 잠에 들기 위해 누워야 했다. 5일을 간절히 바라보며 달려온 나의 오프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나 버렸다.
사실 이런 '급'출근은 큰 병원일수록 드물고 작은 병원일수록 흔하다. 간호부에서 최대한 인력관리를 위해 신경 쓰기 때문에 큰 병원에서는 이런 일들이 빈번하지는 않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대학병원이기는 하나 규모가 작다. 그리고 유난히 NICU는 인력이 부족한 탓에 이런 일은 사실 밥 먹듯이 일어난다. 또 아기들은 출근자의 사정을 봐주며 태어나지 않는다. 한 명 당 볼 수 있는 환자의 수가 한정적인데 계속해서 태어나고 입원하게 되면 결국 오프자를 부르는 일이 발생한다.
다만 이 날은 사뭇 다른 일이었다. 당일 출근하기로 한 만삭의 선배 간호사가 갑자기 진통이 와 입원했기 때문이다. 거절할 수 없는 출근이었다. 거절하면 안 되는 출근이었다. 물론 이런 전화는 '아랫 연차'부터 돌린다. 결국 저연차일수록 급 출근이 빈번한 것은 사실이다. 병원이 고쳐나가야 할 고리타분한 현실이다. 그러나 거절해봤자 전우보다 더 소중한 나의 동기가 출근하게 될 것을 알기에 난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이 곳은 쉬이 아플 수도 없고 출산마저 눈치 보이는 곳이다. 임신순번제는 아직 어딘가에선 존재할지 모르나 나의 병원에는 없다.(적어도 난 그렇게 믿는다.) 우리 모두 그 선생님의 임신을 한마음으로 축복하고 기뻐해 왔다. 더더구나 우리는 신생아실(정상아들이 태어나 가는 곳)과 신생아 중환자실이 같이 운영되어 모두가 선생님의 아기를 보게 될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출산 휴가를 들어가기 전에 갑자기 진통이 오게 되면 부득이하게 다른 이가 근무를 메워야 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간호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3교대 속에 오프가 가뭄 속 단비처럼 얼마나 소중한지 모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NICU의 항해를 계속하다 보면 참 뜻밖의 등장하는 빙하들의 연속이다. 갑작스러운 출근은 그중 가장 작은 부분일 테다. 이런 뜻밖의 일들은 처음에는 부딪히고 부서지며 일상의 타격을 입는다. 간호사뿐만 아니라 모든 직장인들은 경험할 것이다.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기 어려운 직장살이의 현실을. 나도 신규 때는 눈 앞에 빙하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당황스럽다. 이런 당황스러움이 싫어 그만둘까 고민했던 순간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가진다고 별반 다를까?
대신 요즘은 항해의 속도를 조금 늦춰본다. 바쁜 일상 속 삶의 속도를 줄이고 가만히 나만의 휴식을 갖는 연습을 해본다. 느긋하게 흐르는 물살에 몸을 실어 본다. 그럴 때 비로소, 빙하를 만나 부딪혀도 타격이 이전보단 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 항해의 속도를 조금 낮추고 현재의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실어보는 것은 어떨까. 파란만장 인생의 항해에 언제 또 빙하가 나타날지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