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번째 악기, 피아노
#1.
하필, 집이었고,
하필, 어머니였다.
내가 처음으로 배운 악기는 거실에 놓여있던 "피아노"였고,
내 첫(처음이자 마지막) 피아노 선생님은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을 하신 "어머니"였다.
가족끼리는, 서로 뭔가를 배우고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어머니는, 다른 아이에 비해 더 잘 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더 열심히 가르치셨을 것이고,
난 어머니의 열정이 커지는 만큼 그대로 조금씩 피아노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고, 점점 더 피아노를 치기 싫어했다.
만약 학원을 다녔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무리 싫은 피아노라도 어쨌건 교습 시간만 버티면 되는 것이니,
교습 시간 이후 학원을 나서면 피아노하고는 며칠 째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을 텐데,
나의 집에서, 나의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니,
학원과 집 사이의 경계가 무너졌던 것이다.
우리 집이 바로 피아노 학원이고,
피아노 학원이 바로 우리 집이고,
다소 부풀려서 표현을 하면, 어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피아노 연습을 하라고 하셨다.
다른 아이들은 집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 그 시간들의 일부도,
난 억울하게 피아노에 종종 빼앗겼던 것이다.
물론 단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는 "남자"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요즘만큼 흔치는 않았던 터라
내가 피아노를 배운다는 것을 남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한참 낯가림이 심해지고, 예민해지던 대여섯 살 꼬마였던 나에게는 큰 장점이기도 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을 때,
"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지나가던 어떤 남자애를 놀리는 것을 보며,
난 속으로 결심했다.
'내가 엄마한테 피아노 배우는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이날 이후로 난 피아노를 배우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혹은 못했고),
이것이 내 인생 첫 번째 비밀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어머니와 함께 체르니 40번 초반 대까지 치고는
"피아노를 계속 안 친 것을 나중에 후회할 거야"라는 어머니의 설득, 하소연을 과감히 무시하고,
"절필"을 선언하는 작가들처럼, 난 "피아노"를 "확" 끊어버렸다.
#2.
중학교 시절 친구가 꼭 가자고 하여, 친구가 다니는 교회의 <문학의 밤>에 갔다.
인근 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본인의 지인들을 초대한 행사였고, 이 교회의 학생 신자들은 기타, 찬양 등 다양한 공연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연이 한참 무르익어 갈 때쯤,
이웃 고등학교 소속으로 안내지에 나와있는, 나보다 2살인가 많았던 어떤 형님의 피아노 연주 차례가 되었다.
(사실, 아직도 그 이름 세 글자가 생각이 날 정도로, 내겐 잊지 못할 기억이다.)
키가 무척이나 크고 잘 생겼던 그 형님은 영웅본색의 주윤발 같은 버버리 코트를 입고 나와,
캐논 변주곡을 연주했다.
남자인 내가 봐도,
떨릴 만큼 멋진 연주....
돌아오던 길,
나는 "피아노를 계속 안 친 것을 나중에 후회할 거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피아노를 끊고 지내왔던 지난 몇 년을 후회하며 터벅터벅 집으로 왔다.
#3.
몇 년 전,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를 거실에 놓을 피아노를 샀다.
물론, 아이들은,
그때의 나처럼 피아노 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나는 그때의 어머니처럼 "피아노가 얼마나 좋은 악기이고,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라고, 반복해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피아노 치는 횟수를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 집 거실의 피아노는 아이들이 아닌, 내가 주인이어야 맞다.
난 그야말로 틈틈이 피아노를 치고 있으니...
느지막이 나가는 날에는 나갈 준비를 해놓고 10분 정도 연주를 하기도 하고,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연주를 하기도 하고...
제대로 연주하는 곡은 없지만,
그냥,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고,
피아노를 치고 있는 시간이 너무 좋다.
덧붙이는 말:
그때 캐논을 연주했던 형님의 이름에 대한 내 기억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내 기억 속에 있는 그 형님 학교와 이름으로 SNS 검색을 해본다.
내 기억은 정확했다.
이제는 더 이상 버버리가 어울리지 않을 법하게 살이 많이 쪘지만,
당시 유행하던 뿔테 안경을 쓰고 피아노 연주를 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중년의 남성이지만,
사진을 보는 순간,
그 형님이 맞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발매일: 2005.06.09
피아니스트의 앨범도 참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문학의 밤에서 만났던 캐논 변주곡이 들어있던 조지 윈스턴의 Thanksgiving 앨범도 참 열심히 들었고, 라디오 배경음악으로 많이 나왔던 Christopher's Dream이라는 곡이 들어있던 David Landz의 앨범도 참 열심히 들었지. David Landz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부모님께서 데이비드 란츠의 내한 공연 티켓을 내게 선물해 주셔서 공연을 보고 온 기억도 난다. 김광민 씨의 앨범도 모조리 사서 참 열심히 들었었지. 지금은 없어진, 참 좋아했던 까페 "형"에서 "유키 구라모토"의 곡들을 처음 접하고, "형"의 사장님께, 앨범을 구하는 방법을 열심히 여쭤봤던 기억도 난다.
이후에는 장세용, 전수연 씨 등등의 앨범도 참 열심히 들었었다. 아마도 김윤 씨의 이 앨범도 그 맘 때쯤 만난 듯하다. 드라마 음악감독 쪽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곡들 하나하나 다 너무 아름답고 예뻐서, 아껴 듣고 싶을 만큼의 욕심이 나던 앨범이다. 한참 들었던 것이 10년이 훨씬 넘은 듯한데, 여전히, 마음이 따뜻해지고 차분해지는, 참으로 예쁜 곡들이 가득한 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