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by 이상역

내 삶은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태어난 날부터 따라다닌 물음표이지만 하루의 일상이 그렇고 그런 나날의 연속이다.


삶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 그 공존의 뿌리에는 地, 水, 火, 風이란 4대가 뼈대를 이루어 계절마다 순환한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지하에 터를 잡고 사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자신의 존재를 누가 알아주든 말든 여름이면 생명의 진수를 꽃으로 활짝 피워 백일 동안 뜨거운 삶을 산다.


누군가가 추위에 잘 견디라고 외피를 짚으로 둘둘 말아 보호해 준 대가로 여름이 익어가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분홍의 꽃을 피워 생의 의지를 힘차게 드러낸다.


내가 이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시골에서 태어나 나무의 이름을 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분홍색 꽃을 마주한 순간 나무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후 누군가가 나의 궁금증을 눈치라도 챈 듯이 나무의 이름과 유래와 꽃이 피는 시기 등을 적은 팻말을 세워 놓았다. 그 팻말에 적힌 것을 읽어 보고 나무의 이름과 사연을 알게 되었다.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으로도 불린다. 배롱나무의 이름과 사연이야 어떠하든 백일홍은 다른 꽃보다 순박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이 무더워만 가는 계절에 철이 지난 꽃처럼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배롱나무. 한적한 시골길에 피어있는 코스모스처럼 백일홍도 계절의 멋스러움을 뿜어낸다.


세월의 경계를 떠도는 집시처럼 배롱나무도 봄날에 한가한 곳을 떠돌다가 여름이 되어서야 제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꽃을 피웠다. 지는 꽃보다 피는 꽃이 아름답듯이 옷을 훨훨 벗어버린 배롱나무보다 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풍성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집과 직장을 오고 가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삶의 시계추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 수 없는 나날이다. 지나간 시간은 그저 아쉽기만 하고 다가오는 시간 앞에 서면 분주한 마음만 앞선다.


어쩌면 나는 배롱나무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삶도 백일홍처럼 일 년에 백일 동안만 열심히 꽃을 피우고 나머지는 천천히 쉬어가면서 여유롭게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


요즈음 먼 곳으로 여행이나 훌쩍 떠나고 싶은 그리움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삶은 왜 시간이란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은 끝이 안 보이고, 신명 나는 시간은 찾아오지 않는 일상의 수레바퀴. 비록 직장에 적을 두고 출퇴근하는 신세지만, 향기 없는 꽃처럼 의미 없는 나날의 연속이다.


내 삶에서 가장 그리운 시간은 언제일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일까.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 생각해보아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


아마도 배롱나무에게 물어보면 백일 동안 꽃을 피운 추억이라고 말하겠지. 배롱나무꽃에선 어떤 향기가 날까. 오늘따라 배롱나무의 아롱진 이름처럼 하루를 향기롭게 지내고 싶다.


그늘이 그리워지는 계절에 배롱나무 둥치의 굴곡진 선율을 따라 낯선 거리를 분홍빛 꽃잎을 입에 물고 종일 거리를 배회하는 집시의 삶이 그립기만 하다.


배롱나무가 때가 되면 분홍의 꽃을 피워내듯이 삶도 세월에 숙성되어 때가 되면 향기는 아니더라도 생의 꽃은 피워내야 한다. 그것이 나나 배롱나무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이다.


인생이란 행로가 아무리 험난해도 그리고 살아내는 일이 몸에 버거워도 삶의 본바탕은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오롯이 감내하는 배롱나무. 그동안 이름을 알지 못해 불러주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곁을 지나갈 때마다 이름을 불러주리라.


그리고 내일 다시 배롱나무를 만나면 용기를 북돋아 주리라. 홀로 신산한 삶을 잘도 참아내며 살아왔노라고. 화려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백일홍 꽃잎의 부드러움.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는 순박함.


그늘진 곳에서 생명의 꽃이 피는지도 지는지도 모르게 한 세상을 살다가는 배롱나무의 삶. 아마도 분홍색 꽃잎이 지고 나면 이번 여름도 지나갈 것이다.


녹음이 우거진 속에서 피는 꽃은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다. 배롱나무도 그런 차가운 세상에 존재하다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내가 배워야 할 삶의 방식도 배롱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사람과 무리 지어 살더라도 누가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존재하는 삶의 방식을 배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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