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동아리
우리 사진 동아리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지리산 종주에 대해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지리산의 고사목을 사진에 담으러 해마다 가는 전통.
4박 5일 일정이었다. 첫날은 노고단, 둘째 날은 벽소령, 셋째 날은 장터목에서 자고, 마지막 날은 천왕봉 아래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집으로 돌아온다. (연하천인지 벽소령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빠가 모아주신 파일철에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난데없이 등산이라니, 설레면서도 겁이 났다.
산에서 3박을 버틸 짐을 정하고, 서로 나눠 들어야 했다. 물론 장비도 갖춰야 했다. 그러곤 모두 컴퓨터실로 이동했다. 다음 주, 국립공원 산장 예약 시스템 대피소 숙박 예약을 해야 한다며 오늘은 예행연습을 해 보자는 것이다.
다음 주가 되어 다시 모였고, 결과를 확인했다. 나는 실패. 하지만 몇몇 친구와 졸업한 선배들이 성공해 올해도 무사히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며 선생님은 기뻐하셨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수강신청을 성공 못할 반응속도의 소유자’라는 걸 알게 된 건.
짐 준비는 쉽지 않았다. 판초우의는 대대로 내려오는 것을 나눠 쓰고, 단체티도 맞춰 입기로 했지만, 가장 중요한 등산화가 없었다. 엄마와 발 사이즈가 달라, 엄마 친구의 등산화를 빌렸다. 그 시절엔 스틱의 존재조차 몰랐다.
판초우의, 침낭, 배정된 부식, 물병, 여벌 옷, 그리고 카메라까지 등에 멘 배낭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관광버스를 타고 성삼재 주차장으로 향했다.
산 아래부터가 아니라 주차장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했는데도 숨이 찼다. 일행을 뒤로한 채 계속 오르기만 했던 것 같다. 1박 장소인 노고단에 도착하니, 나보다 먼저 도착한 건 선생님 한 분뿐이었다. 이어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부식을 나눠 짊어진 조를 찾아가 밥을 먹었다. 그때 한 친구가 가방에서 자기 개인 거라며 통조림을 꺼내 혼자 먹었다. 다른 친구들의 얼굴은 잊혔지만, 그 친구만은 이름과 얼굴이 또렷이 기억난다.
식사를 마치고 여름날 잠자리를 감상했다. 좀 더 추워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잠자리들은 이미 산 위에 살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 대피소에서 내려다보는 탁 트인 전경 속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은 그 자체로 한 폭의 풍경이었다. (최근 유튜브에서 알게 된 건, 이 계절의 잠자리는 남쪽 나라에서 바람을 타고 온다는 사실이었다.)
고양이 세수로 간단히 씻고, 신분증을 들고 대피소 사무실 앞으로 모였다. 잘 곳을 배정받고 바로 잠들었다. 가장 먼저 잠든 나는 새벽에 눈을 떴다. 어스름한 빛을 맞으며 샘터로 내려갔다. (대피소 밑 샘터의 추억은 어떤 대피소에서인지 헷갈린다.) 샘 근처에는 새벽 출발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렌턴을 머리에 켠 채 가파른 내리막에 줄지어 있었다.
둘째 날부터는 나와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생겼다. 혼자 걷는 나를 인솔하기 위해 선생님 중 한 분과 같이 등산을 했다. 선생님과 함께하니 등산로 주변의 샘터도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 보던 선생님이 아닌, 옆집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벽소령,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도달했다.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해 무거운 배낭은 대피소에 두고, 간식과 랜턴을 챙기고, 판초우의를 입었다. 새벽 공기는 살짝 서늘했고, 모두가 움츠린 채 정상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일출을 보았다.
일출 후 표지석 앞에서 찍은 사진은 아직도 내 책상 위에 있다. 원본 필름이 나에겐 없기에 다시 가질 수 없는 사진. 땀으로 젖은 얼굴, 빌려 신은 등산화, 그리고 활짝 웃는 젊은 내가, 그 산 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