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동호회
이전 일기에 담지 못한 자투리 추억들을 꺼내본다.
씬 1: 지리산
두 번의 지리산 종주를 마친 3학년. 세 번째 종주를 떠나려던 날, 동생이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나란히 산을 오르며 천왕봉에서 끝날 줄 알았던 우리의 산행은, 뜻밖에도 이튿날 막을 내렸다. 두 번째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폭우로 숙박이 금지되었다는 안내를 받은 것이다. 이미 오늘 하루의 코스를 소화해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게 “내려가라”는 말은 너무 가혹했다. 결국 가장 가까운 민박집을 예약하고, 벗어두었던 판초우의를 다시 걸쳐 입은 채 기나긴 하산을 시작했다.
내겐 다른 종주와 구별되는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동생은 그 일을 ‘실패의 역사’라 부른다. 이후 우리의 길은 달라졌다. 동생은 대학 시절 국토 종주에 도전했지만 건강 문제로 중도 하차했고, 그것 역시 ‘실패의 경험’이라 여겼다. 그 실패를 극복해 보자는 마음에 등산 소모임에 꾸준히 나갔고, 거기서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씬 2: 초점 실패
어느 토요일, 동아리에서 두 팀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선생님 결혼식 축가팀, 다른 한쪽은 계명대 사진대회 참가팀. 나는 은근히 사진대회에 가고 싶었고, 다행히 그 팀에 속했다.
SLR 카메라에 흑백 필름을 넣고, 건물 사이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는 모델들을 담았다. 2~3통의 필름을 제출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응모할 만한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것. 습기 찬 날씨에 불편했던 안경을 벗고 수동 초점 렌즈를 조작한 때문이었다. 안경을 쓰고 찍은 초반 몇 장만 선명했고, 이후 필름 전체가 초점이 나가있었다. 반면 함께 간 동아리 회장은 입상했고, 그것이 사진 동아리 입시에서 가산점으로 이어졌다.
씬 3: 백합제, 그림자
3학년 백합제. 다른 부원들은 수능 준비로 빠졌고, 나는 수시 합격 덕분에 참가 여부를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주제를 고민하며 골목을 헤매다 우연히 찍은 사진. 계단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에서 답을 찾았다. 주제는 ‘빛과 그림자’
첫 컷은 기괴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겼다. 하지만 그만큼의 사진을 다시 찍기란 쉽지 않았다.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가장 아름다워지는 시간은 하루 두 시간 남짓. 2주간 같은 시간에 카메라를 들었지만, 첫 사진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지 못했다. 결국 그 사진과 몇 장의 비슷한 사진으로 백합제를 마쳤다.
씬 4: 사진과의 거리두기
사진은 내 취미의 영역에서 멀어졌다. 졸업 10년 후, 평생교육원 ‘DSLR 사진’ 강좌를 들으며 다시 카메라를 잡았지만, 디지털의 세계는 낯설었다. 1초에 수십 장씩 찍히는 사진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고, 무한한 컷수 속에서 가장 좋은 사진을 고를 감각이 내겐 없음을 깨달았다.
백합제에서 ‘시장’을 주제로 할머니들을 몰래 찍던 기억, 피사체가 돼줄 것을 청하던 기억, 지리산 고사목의 구도를 아쉬워하며 출입통제를 벗어났던 기억, ‘빛과 그림자’라는 주제를 붙잡고 씨름하던 기억... 그 모든 기억은 결국, 나의 한계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사진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대신, 내게는 필름철과 필름 카메라, 그리고 이제는 잘 쓰지 않는 DSLR이 남았다.
이렇게 고등학교 3년을 함께한 사진의 기억을, 오늘은 B컷처럼 펼쳐본다. 너무 아파서 지운 기억도, 사진대회 수상 같은 순간도 빠져 있다. 결국 나를 채우는 건, 내가 오래도록 간직한 장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