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비가 내리더니 별안간 추위가 찾아왔다. 겨울이 오려나보다.
가을이 떠나간다. 어느덧 정이들었던 단풍은 낙엽이 되고 푸르고 높던 하늘은 회색이 짙어진다.
추억 많던 계절은 움츠러드는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갈곳없는 감정은 찬바람 처럼 나를 때리고 지나간다. 무엇보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계절이 왔는가 싶다.
겨울에는 밖으로 좀 처럼 나가지 않는다. 산뜻하고 차가운 새벽의 공기를 마실 때도 있었고, 바람이 부는 광진교 다리 위에서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던 때도 있었지만 겨울은 달랐다. 겨울의 모든 것은 아팠고 겨울은 내게 침묵의 계절이라 말할 수 있었다.
수 많은 이별과 만남이 있었던 11월 어귀에서 흩어지려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쓴적이 있었다. 겨울은 내게 말했다. 앙상한 가지 처러 여윈 내게 다가와 유독 따듯한 말을 건넸다. 보내주라고. 나는 그것을 나의 내려놓음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겨울을 그저 추운 계절로만 기억하려고 한다. 그러나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다. 어릴적 광양에서 보던 동백의 아름다움은 그 꽃의 붉음 처럼 내 가슴에 설렘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내게 또다른 소망을 품게했다. 겨울은 끝이 아니며 마냥 외롭고 쓸쓸한 계절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겨울은 감정을 지우고 땅 속에 들어가 길고 긴 잠을 청하는 계절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장 아름답게 꽃피울 기회의 계절이었다. 그렇듯 시간은 살아가는 이의 각오에 따라 많은게 달라지곤 했다. 내겐 쓰디쓴 우울과의 투쟁이 나름대로 나를 꽃피울 시간으로 돌아올 것을 그때는 왜 모르고 아파했을까. 웅크린 봉오리 처럼 아직 꽃 피우지 못한 가슴들에 나는 이렇듯 심심한 위로를 던질 뿐이다.
그대. 그대는 동백이다. 이제 그대의 꽃피울 계절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음이 내게 허락된다면 나는 그대들을 위로하고 싶다. 어느날 이사야의 책에서 읽었던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신의 계시 처럼 그대를 위로하고 싶다. 그대의 눈물을 닦으며 그대 머리 위에 비출 광채와 영광을 노래하고 싶다.
우리에겐 우리가 뜻하지 않은 우리의 때가 온다. 그것이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다면 우린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혹여 그렇지 못한들 어떠한가. 그저 이 계절 속에서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이들 처럼 잠잠히 추위가 지나가길 정녕 그러기를 바래도 그것이 어찌 죄가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