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매혹적인 그들
그와의 첫 만남은 하얀 눈을 녹여낼 만큼 찬란했다. 빛나는 순간은 짧지만 강렬하게 기억에 남듯, 회피형 인간과의 첫 만남은 유독 더 아름답게 각인된다. 그는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며, 어디론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첫눈에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은 순수해 보이기도 했고, 불도저처럼 돌진하는 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도 했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세상 어디에서도 만난 적 없는 종족을 마주한 것과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세계는 더 넓어지고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회피형은 대체로 타인에게 잘 보이는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능하다. 그들은 '나를 구속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기류를 풍긴다. 처음엔 그 자유분방함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는 그 자유를 닮고 싶었고, 그와 함께라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 자유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를 겨울의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 3월 초에 처음 만났다. 깔끔한 니트에 잘 정돈된 머리카락, 세련된 표정과 제스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탓에 그가 끊임없이 내 마음을 두드리고 다가오는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린 서로 첫눈에 상대를 알아봤다. 첫 만남이 두 번째 데이트로 이어지는 데까지는 3주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그는 계속해서 만남을 요청했지만 잦은 출장과 야근으로 시간을 낼 수 없던 탓에 나는 늘 시간을 미루는 상황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나를 존중하며 기다려 주는 태도를 취했고 그 덕에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마음은 더욱 활짝 열리게 됐다.
우리는 두 번째 데이트에서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가 내뱉는 이야기를 관객처럼 몰입해 들었다. 그의 삶, 취향, 가치관을 들을 때마다 울고 공감했고, 서로의 공통점을 찾는 순간마다 나는 그와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는 나에 대해 깊이 물은 적은 없었다. 내 생각은 어떤지 잠시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그의 중심으로 이뤄졌다. 나는 그의 말을 수용하고 경청하며 리액션만 해도 충분했다. 매혹적인 카리스마와 지적인 대화는 날 매료시켰지만 결국 양방향 소통은 아니었다. 난 그 사실을 깨닫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나에 대해서도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눈덩이 처럼 쌓여 불만으로 쏟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회피형의 첫인상에 속는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만이 가진 특별함'에 끌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유로움과 독립성에 매혹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 모순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그를 좇고, 더 깊이 빠져든다.
첫 만남의 찬란함은 관계의 본질을 가린다. 그는 나를 좋아하는 듯 보이고, 함께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조금씩 드러나는 것은, 그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나'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그 감정이 충족되지 않는 순간, 그는 언제든 관계에서 한 발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매혹적인 그들에게 이끌리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낯설고 신비로운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인간 본성 중 하나'라고. 하지만 회피형 인간에게 빠져드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들은 쉽게 잡히지 않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고, 그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평강공주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겐 특히나 더 그런 일이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 사람은 왜 이렇까?’라는 물음이 ‘내가 이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 주겠어’라는 다짐으로 이어지지만,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생각이 없다.
첫 만남의 매혹은 찰나적이다. 그러나 그 찰나는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흔든다. 그는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자유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패이자,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무기였다.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그의 방패를 내가 빼앗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첫 만남의 찬란한 기억, 그리고 그에게서 느낀 강렬한 애정공세는 나를 붙잡아두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첫 만남의 찬란함은 결국 사라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그가 세운 벽과 나 혼자 서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불안에 떨며 온갖 질문을 스스로에게 쏟아냈고, 결국 나는 ‘왜 이런 인간을 사랑하게 됐을까?’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다다랐다.
누군가에게, 특히나 내가 사랑이라 믿는 사람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 욕망. 그런 인정욕구가 나를 그의 옆에서 버티게 하는 게 아니었나. 어쩌면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나의 결핍이 그를 더 멋진 인간으로 포장한 것은 아니었을까.
답을 찾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여정을 통해 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 자신을, 그리고 나의 연애관을, 더 나아가서는 한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넓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계속 답을 찾다보면, 나는 더 단단하고 솔직한 사랑을 꿈꿀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