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에게 - 5

[경주], 장률

by Chiara 라라

정아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불더니 벚꽃 잎이 거의 다 떨어졌어.


바닥은 하얀색 분홍색 작은 꽃잎들로 폭신한 길이 만들어진 것처럼 아름다워 보여. 가까이 다가서서 그 길의 가운데를 보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짓이겨진 꽃잎이 피가 굳어 딱딱해진 상처처럼 진한 갈색을 이루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자아내지.


목련 꽃잎으로 풍선을 만들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었니?


지난달에 처음 알고 굉장히 신기했어. 목련 꽃잎 끝을 조금 잘라서 살짝 비비면 두 갈래로 갈라지나 봐. 그 사이에 숨을 불어넣으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고 하더라고. 목련 꽃잎 풍선 사진을 보았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나도 산책길에 꼭 꽃잎을 주워 와야지 다짐했는데 그 뒤로는 바닥에 떨어진 예쁜 꽃잎을 보지 못했어. 꽃잎이 있더라도 자신보다 강한 무언가에 치여 상처받은 모습이었거든. 꽃이 피기 전 목련꽃을 감싸고 있던 털이 복실한 봉오리들만 바닥에 툭툭 무심한 듯 떨어져 있더라. 그렇다고 일부러 꽃잎을 뜯어낼 수는 없으니까 나무에 성큼성큼 달려있는 목련꽃만 목이 아프게 한참을 올려다보았어. 바닥을 두리번거리다가 가만히 앉아서 손을 뻗기도 하고 갑자기 일어나 목련 나무 위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던 어떤 여자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내내 그 시선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목이 아파서 이제는 들어가야겠다 마음먹고 고개를 떨구는 순간,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어떤 기운이 있는 것 같긴 했어. 뭐가 있었나 하고 그냥 넘기긴 했지만. 내년에는 꼭 시도해 볼래. 근데 그 목련꽃 풍선은 부풀고 나면 바로 꺼질 텐데, 쪼그라든 그 모습에 가슴이 아플 것 같아. 더 이상 꽃잎도 풍선도 아닌 그 아이는 결국 휴지통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겠지. 이 또한 인간의 욕심인가. 아무래도 목련 꽃잎 풍선은 만들지 말까 봐.


자연을 좋아했던 너.


산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산속 나무들 사이에 있는 건 좋아했지. 사람은 나무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고, 또 흙의 기운도 받아야 한다고 산에서 온 사람처럼 말을 하기도 했어. 산속에서 도라도 닦아야 할 것 같은 비장한 눈을 하고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너는 외모부터 천상 도시 여자여서 그 말에 큰 신뢰가 가지는 않았단다. 주말이나 쉬는 날이면 집에 있지 못하고 어디로든 달려 나가면서도 막상 사람들을 피해 한적하게 나무들 사이에 있을 때면 정아 너, 조금은 불안해 보였던 거 아니. 그저 고요히 나무를 보고 하늘을 보고 흙을 보고 허공을 쳐다보며 자연을 조금씩 품을 수 있게 되었던 건 오히려 나였던 것 같아. 나는 집순이니까 네가 그렇게 밖에 나가야 한다고, 자연에 있어야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다고 난리 난리를 치지 않았다면 평소와 똑같이 언제고 집에서만 머물러 있었을 거야. 지금도 어디 멀리는 나가지 못하지만 네 말을 떠올리며 매일 산책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산책 중에 만나는 나무와 새, 고양이와 작은 꽃,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향기들을 느끼면서 네가 그 속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봄에는 꽃 나들이를 가야 하고, 여름에는 캠핑을 해야 하고, 가을에는 단풍을 봐야 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불멍, 눈멍을 때려야, 그게 삶이라고 주장하던 우리 정아. 너의 그 굳은 심지는 한해 한 해가 지나도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어. 정해져 있는 그것들을 해야 할 때가 오면, 너의 말을 들으며 아 이제 드디어 계절이 바뀌었구나, 알 수 있었고.


올해는 꽃이 일찍 피었단다. 그 어느 해 보다 빨리 꽃이 피고 또 그만큼 더 이르게 꽃이 떨어졌어.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더니 어떤 사람들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다니더라. 그러다가 갑자기 꽃이 활짝 핀 거야. 밖에 나가면 벚나무가 온통 하얀 꽃들을 피워내고 있었어. 분홍색 작은 꽃도 있었고 폭죽의 불꽃같은 모양의 작은 노란색 꽃도 피고 있었어. 꽃들의 이름은 잘 모르는데 벚꽃은 알 것 같아. 그 벚꽃도 종류가 다양하다는 걸 너를 통해 알게 되었지. 분홍빛이 나는 하얀색 벚꽃이 4월 초에 먼저 피고, 그 후에 조금 더 화려하고 꽃망울이 조금 더 큰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고 얘기해 줬어. 벚꽃 구경을 먼저 가고, 일주일 정도 그 벚꽃 속에서 마음을 피워놓고 나면, 그다음에 겹벚꽃을 보러 가는 거라고 했지. 튤립도 벚꽃과 비슷한 시기에 피는데 요즘에는 튤립을 보러도 많이 가니까 튤립 피는 날짜도 잘 알아봐야 한다고 진지하게 얘기했어. 장소도 중요한데, 어디든지 꽃놀이하는 곳에는 사람이 많긴 하겠지만 그래도 여의도만 아니면 더 좋다고. 달달한 커피를 사 가지고 맛있는 쿠키와 함께 피크닉을 하는 거야.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더 좋고, 햇볕이 쨍쨍해도 꽃들이 반짝여서 예쁘고. 날이 조금 더우면 얇은 긴팔을 입으면 되고, 날이 조금 선선하게 느껴지면 카디건을 걸치면 되니까 어떤 날씨여도 다 좋다고. 단, 비가 내리면 꽃이 금세 떨어지니까, 또 바닥에 앉아서 여유롭게 피크닉을 즐기기가 어려우니까 비는 안 오는 게 제일 좋다는 것, 또 하나 더 바라는 게 있다면 미세먼지나 황사는 야외활동을 할 때 건강에도 안 좋고 시야도 흐리고 사진을 찍어도 번져서 나오니까 피했으면 좋겠다고. 꽃은 매년 피는데 매년 이렇게 신이 나서 얘기하는 너를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며 따스한 봄기운이 느껴지곤 했어. 꼭 그렇게 밖에 나가서 꽃을 봐야 할까, 어디에 가서 사람들에 치이면서까지 피크닉을 해야 할까, 이런저런 걱정을 하면서까지 꽃 나들이가 필요한 걸까, 속으로는 구시렁거렸지만 막상 꽃을 보며 그곳에 조용히 있으면 주위의 소음들도 그렇게 크게 나쁘게 들리지는 않더라.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꽃나무 아래에 앉아서 꽃을 구경하고, 바람을 느끼고, 누워서 떨어지는 꽃을 바라보기도 하던 그 아름다운 순간이 생생히 기억나.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하얀 벚꽃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어찌나 파랗던지.

어느 날에는 튤립을 보러 가자고 네가 앞장섰는데, 그 많던 만개했다던 튤립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몇 개 보이지 않았던 적도 있었어. 튤립이 이렇게 생겼었나 우리 둘 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에 물음표를 그렸었는데 말이야. 튤립이 생각보다 별로 예쁘지가 않았어. 튤립이라는 꽃은 한 송이 따로 떨어져서 존재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때 잠깐 했어. 튤립은 꽃송이도 크고 색도 다양하더라. 그런데 우리가 꽃가게에서 보는 튤립은 꽃과 꽃대만 보이잖아. 흙에 심겨있는 튤립은 꽃대와 함께 기다랗게 말아 올려진 잎사귀도 초록 초록하니 아름다웠어. 하나의 튤립이 꽃대와 잎사귀와 함께 그렇게 완성된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던 것 같아. 그동안 난 만개한 튤립이 아니라 아직 벌어지지 않은 꽃봉오리 튤립만을 보았었나 봐. 만개한 꽃의 무게에 꽃대가 힘이 없어 툭 하고 꺾어지지 않기를 속으로 빌었어. 결국 그다음 해에 우리는 딱 적당한 시기에 튤립이 만개하고 많이 많이 피어있는 공원에 성공적으로 도착을 했지. 시간도 딱 적당했고 햇살도 적당했어. 다만 바람이 조금 불어서 자꾸만 모래가 날렸다는 거 하나만 흠이었을 거야. 커피도 너무 맛있었어. 동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런 시그니쳐 커피를 그 공원 근처에서 팔았거든. 커피를 좋아하면서도 너무 비싼 돈을 주고 커피를 마시고 싶지는 않은데, 이 커피는 마시고 또 마시고 또또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는 딱 한 잔으로 족하다고 했지만 말이야.


튤립은 정해진 구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과 함께 그 안에 갇혀 있었어. 그 경계 사이로도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들어갔었는데, 왜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지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알 수 있었지. 사람들이 들고난 자리는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흔적이 남았고 그 흔적은 꽃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 같았거든.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굳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름다운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서 더 아름다운 꽃들을 망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람들의 이기심에 꽃들이 아파하고 있어서 나도 속이 상했지만 그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소리 내어 들어가지 마세요, 말할 수는 없었어. 너는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네. 우리는 피크닉을 잠시 하고, 튤립밭을 돌아다니며 한참 동안이나 구경을 했어. 큰 꽃 하나를 오랫동안 바라보기도 하고, 멀리서 전체적으로 보기도 하고, 가까이서 꽃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도 하고 말이야. 만져보고 싶었지만 뻗은 손은 그냥 허공에서 맴돌았어. 꽃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했다가 결국은 움츠러들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우리 집에 튤립이 있다면 줄기에 닿은 잎을 만져주고 꽃봉오리에 입맞춤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허황된 생각도 했단다. 내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 가니? 정아 넌 가능할 것 같아. 하지만 나도 어쩌면 살아있는 생생한 식물이 집에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면, 그렇게 먼저 다가가서 터치를 시도했을지도 모르겠어.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공원에 아무리 의자가 많아도 우리는 꼭 바닥에 앉았어. 피크닉 기분을 내려면 의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이야. 꽃나무 아래나 꽃나무 가까이에 있는 흙이나 잔디 위에 우리가 좋아하는 천으로 된 피크닉 매트를 깔고 여유를 부리는 거야.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쿠키를 먹고,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하지. 책을 읽기도 하고, 무언가 끄적이기도 하고.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제일 좋아했던 것 같아. 사람이 많지 않으면 넌 잔잔하게 음악을 틀기도 했어. 우리 둘 다 클래식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냥 그걸 듣는 걸 편안하게 생각했잖아. 꽃이 만개했을 때에는 그런 여유를 부리기가 쉽지는 않아서 아쉬웠지만 꽃과 자연, 우리 둘의 시간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 뭐.


남자친구와는 주로 지방으로 꽃구경 드라이브를 가곤 했고, 나랑은 주로 서울이나 많이 멀지 않은 근교에 있는 꽃들을 보러 다니곤 했던 거 기억나지? 지방으로 꽃구경을 가면서 너는 나한테 조금은 미안한 모습이었고, 같이 가자고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나는 둘 사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둘은 나와 같이 있으면 편안하다고 자주 동행을 요구했지만 나는 그렇게 편안하지가 않아서 권유받았던 만큼 거의 다 거절했던 것 같아, 미안해 정아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기회였는데. 더 가까이 자주 또 오래 있으면 둘 사이가 어떤지 세심하게 알아차릴 수도 있었을 텐데.


경주는 벚꽃이 예쁘고, 전주는 겹벚꽃을 보러 가야 한다고 했지. 경주의 겹벚꽃도 예쁘지만 몇 주 동안 거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나를 선택한다면 벚꽃을 보러 갈 거라던 너였어. 하동에서의 꽂길 드라이브는 정말 꿈만 같다고 허공에다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얘기하는 너를 보면 정말 아름다운 곳이구나, 나까지도 느껴졌어. 네가 보여 준 사진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그런 감동을 너의 표정을 통해서 알 수 있었어, 고마워.


올해는 꽃이 일찍 폈다고 했잖아. 정아야, 나, 경주에 다녀왔어.


경주는 우리 고등학교 때 체험학습으로 수학여행으로 와 본 게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요즘 학생들도 그렇게 오나 봐. 첨성대 앞에서 교복을 입은 여러 무리의 학생들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와글거리는 모습을 보았거든. 첨성대 입구의 사무실에서 나온 어떤 어르신들은 학생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뭐가 되고 싶은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시더라. 학생들에게 호기심이 많은 그분들의 질문이 성가실 수도 있었을 텐데 성심껏 대답하는 그 학생들이 참 예뻐 보였어. 요즘 애들은 말이야, 이런 말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우리 때도 그렇고 어느 때에든지 ‘요즘 애들’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을 것 같기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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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 바깥쪽에 있는 길을 걸었어. 차도를 사이에 두고 벚나무들이 정말 아름답게 늘어서 있더라. 대릉원에는 들어갈 필요가 없어! 대릉원 바깥을 걷는 거야, 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어.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간간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는데, 그 바람을 따라 꽃비가 내렸어. 와아, 절로 감탄이 나는 풍경. 아름답다는 말 말고 또 어떤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돌담길에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이 도시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들이 그려 있었고, 그 그림을 하나씩 살펴보며 걷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었어.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나온 가족도 이 돌담길과 벚꽃과 잘 어우러져서 한 장의 사진 같았어. 그 모습을 내 핸드폰에 담고 싶었지만 그건 그 가족만의 사진으로 남아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그저 부러운 마음을 품고 그 옆을 지나가기만 했어. 대릉원의 끝은 첨성대로 가는 길로 이어져 있었어. 그 길에도 가득한 벚꽃이 넘치게 피었더라. 벚꽃 축제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지는 바람에 개화 시기가 빨라졌더라고. 나는 사람들을 피해서 일부러 일주일 정도 일찍 찾아간 거였는데 덕분에 활짝 핀 벚꽃을 정말 마음껏 볼 수 있었어. 네가 말하던 그 풍광을 나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지.


서울역에서 신경주역까지 KTX로 2시간 8분,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울 경부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버스로 3시간 30분이 걸렸어. 집에서 서울역까지, 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집까지 걸리는 시간도 있으니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곳이더라. 밤에 안압지도 산책해야 하고, 밤벚꽃도 충분히 봐야 하니까 적어도 1박은 해야 된다고 했던 네 말이 기억났어. 그 속에는 경주가 먼 곳이니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돌아보는 게 좋을 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혼자서 경주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아직 내 방도 네 방도 아닌 다른 곳에서 자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 아무것도 모르니까 어쩌면 하루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아침에 출발해서 점심때 도착했고, 낮에 여유롭게 벚꽃 구경을 했어. 네가 말한 따뜻한 콩국이랑 찹쌀도넛도 먹었어. 역시 시간은 금방 지나가더라. 해가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벌써 조금씩 어둠이 찾아오는 것 같았어. 난 네가 말한 밤벚꽃도 구경하고 싶었고 밤에 안압지도 산책하고 싶었어.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깜깜해질 때까지 있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난 너의 말대로 따라보기로 했어. 안압지는 2011년에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바뀌었더라. 천천히 천천히 더 오랫동안 더 밤이 깊어지도록 걷고 싶은 곳이었어. 달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내가 오래전에 영화를 보며 휘리릭 그린 그림이 생각났어. 그 그림 기억나니? 방에 동그란 탁자가 하나 있고, 그 탁자 위에는 꽃병같이 목이 긴 병이 하나 있지, 창문 밖으로는 초승달이 떠 있어. 영화 [경주]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지 극장 안에서 수첩에 그린 그림이야. 영화의 내용보다는 모든 것이 낮은 경주의 모습이 잘 담겨 있어서 인상 깊었던 게 기억나. 그 그림은 아마도 영화 속에 어떤 시의 내용이지 않았을까 싶어. 너무나도 오래전의 일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주는 어떻게 변했을까? 많은 변화가 있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게 많아지는 것 같아. 사라지는 것도. 경주만큼은 변하지 않는 시간 속에 머무는 그런 곳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경주에 다시 가게 된다면 여유롭게 적어도 1박은 하고 올게.

미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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