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내집 마련은 환상이 아니었다
20대에 내집 마련을 하면 어떤 기분일까?
막연하게 상상은 해봤지만 그게 현실이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일찌감치 결혼 대신 나자신을 택한 내 인생 계획 속에서, 내가 첫 집을 사는 건 40대 초반이었다. 그 때까지 2,30대 젊은이가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즐거움을 최대한 짓누르고 저축을 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그 때 계획했던 내 첫 집은 넓진 않아도 깨끗하고 투자 가치가 있는, 누가 봐도 나무랄 데 없는 수도권의 15평 아파트였다.
참 현실적이기도 하지, 마흔까지 생활비 빼고는 모조리 저축하며 금욕적으로 살다가 간신히 구매하는 아파트가 경기도의 소형평수 아파트라니. 나름대로는, 그때쯤엔 차가 있을 테니 운전해서 출퇴근을 한다는 전제 하에 고심해 계획한 선택지였다. 살아보니 서울은 일자리를 구하거나 쇼핑하기엔 좋으나 거주하기에 좋은 도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기가 너무 나쁘고, 땅값이 비싸 가게들도 경기도보다 작고, 어차피 꿈꿔볼 만한 가격이 되지 않는 극 도심을 제외하고는 건물들도 전반적으로 낡았다. 그러니 공기 좋고 있을 것 다 있는 경기도에 내 집 마련을 하고, 여유롭게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노동을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노후엔 주택연금으로 살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계획은 언제나 계획일 뿐,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2020년 12월, 20대의 마지막해에 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15평 빌라의 주인이 되었다. 집이 있는 동네는 성북구의 가장 싼 동네 중 한 곳으로 서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기가 좋으며 산과 절이 편의점처럼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초등학교도 있고 지나만 가도 펄펄 날뛰는 싱싱한 청춘이 뜨거운 열기를 얼굴에 훅 끼얹는, 대학교도 두 개나 있었다.
내가 산 집은 이 동네에 위치한 두 개의 대학교 중 조금 더 교통이 편한 학교와 가깝다. 전철역 5분 거리에 있는 이 집에는 커다란 창이 큼직큼직하게 뚫려 있고 그 창문들의 프레임마다 산과 도시가 적절히 어우러진 풍경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첫 눈에 반한 집. 여러 가지 현실적인 배경이 있었지만 내가 이 집을 산 진짜 이유는 단 하나,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구옥 빌라를 사는 건 미친 짓이다.
집값이 오르기는커녕 점점 떨어질 것이다.
겨울이 되면 수도관이 동파해서 물이 안나오는 건 부지기수요,
상상도 못한 온갖 문제들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구옥 빌라를 사겠다.’고 결심한 후, 정말로 매매계약서에 사인을 하기까지 온갖 주변의 말들과 온라인을 떠도는 말들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때로는 얻어맞으며 하루에도 수십번 내 결정을 의심했다. 특히 처음 구옥 빌라를 매매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을 때,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는 직장상사가 ‘투자가치도 없고 관리하기 힘든데 그건 정말 아닌 것 같다. 진지하게 고민해봐라.’고 걱정을 해서 내가 집을 샀다는 사실도 회사에 밝히지 않은 상태다.
안그래도 일이 많아 둘이서 죽을동 살동 간신히 업무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사적인 문제로까지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을 가족처럼 아끼고 그들의 문제를 제 문제처럼 고민하는 그녀의 성격상, 내가 구옥 빌라를 매매해서 살다가 정말 우려했던 문제라도 생기면, 그 문제로 나자신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을게 뻔해서다. 그래서 나는 19금 로맨스 소설책을 엄마 몰래 사서 숨겨놓는 아이처럼, 내가 집을 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집이 주는 안정감과 재미는 보다 더 은밀한 즐거움이 된다.
2021년 1월, 35년만의 최저 기온이라는 극악의 한파 속에서 나는 따뜻한 내 집이 있다는 사실에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별 거 없다. 집을 사기까지 어떤 문제를 겪었고, 그것들을 어떻게 헤쳐나갔으며 집을 어떻게 고치고 가꿔나가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올해로 서른이 된 나는 직장생활 5년차에 아직도 대리를 못 단 불운한 회사원이자 1년 넘게 애인 대신 왓챠와 저녁 데이트를 하고 있는 별것 없는 인간이다. 팔로워가 많은 sns 계정도 없고 유튜버도 아니기 때문에 천하의 달필이라 한들 내가 써낸 글이 책으로 출간될 가능성도 지극히 낮다. 그렇지만 쓰고 싶었다. 주택 매매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든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으니까.
남들 보기에 대단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주택 구입기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만큼의 큰 의미는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첫 집을 사는 일은 인생의 전환점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비범하지 않은 소시민의 사소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즐거움이나마 줄 수 있다면 큰 기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