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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림공작소 Jul 24. 2019

요즘 필요한 시선이 담기다

일흔 번째 영화, 박열을 보고


사극은 드라마든 영화든 잘 챙겨보는 타입은 아닌데, 간혹 관심이 생기는 작품이 있다. 이 영화가 끌린 이유는 꽤 다양하다. 이름도 잘 모르는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휩쓸다시피 한 점.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이준익 감독은 작은 영화를 표방하는 것 같은데도 200만 명 이상이 봤다는 점. 역사에 무지한 티가 나지만, 처음 들어본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최근에 한일 관계가 매우 안 좋아지면서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보고 싶어진 것도 한몫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궁금해져서 보긴 했지만, 솔직히 큰 기대를 한 영화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배경의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영화는 보기 전부터 본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악독한 일본 순사와 억울한 일만 계속 생기는 독립운동가, 반복되는 시련에도 굽히지 않는 모습을 통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주지 시킨다. 이런 영화를 보며 느끼는 바는 크지만, 새롭지는 않다. 


그런데 이 영화는 조금 달랐다. 독립운동가가 아닌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박열과 일행들, 그리고 그 일행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조차 구분되지 않는다. 명확한 선악이 있어야 하는 시대인데, 그 기준이 다르다. “일본의 권력에는 반항심이 있지만, 민중은 친밀감이 들지”라는 대사처럼, 일본의 모든 것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관동대지진 때 우리나라에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며 무자비한 학살을 일삼는 모습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던 일본의 모습이었지만, 우리나라 국민이라 할지라도 보여주기 힘든 행동을 한 가네코 후미코 또한 일본의 모습이었다. 


영화가 기존의 영화와 달랐던 점은 또 있다. 다른 일제 강점기의 영화에 비해 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달랐다. 박열과 후미코의 첫 만남부터 동거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가짜 같은 이름의 박살단이 한 명 한 명 응징하는 모습도 어딘가 만화 같았다. 영화 시작할 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자막 대신 철저한 고증이 이뤄졌다는 자막 때문에 더더욱 현실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한국이 아닌 일본이 무대였던 점도 한몫을 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민중과 권력을 나눠서 봤다는 점이다. 한일관계로 뜨거워진 요즘, 투쟁심 좀 높여볼 생각으로 보게 된 영화인데 오히려 좀 차분해졌다. 요즘 온라인상의 글을 보면 무조건적인 증오가 정의이자 신념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물론, 그 손가락질은 결혼한 한국인에게도 향한다), 일본 계열의 회사나 일식집, 이자까야 등은 전부 다 망해버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자까야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난받아야 할 것이 전혀 아니었기에, 그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우리나라가 전부 다 옳고, 일본이 전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영화에 나타나듯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그랬다. 영화 속 박열처럼, 화살이 올바른 방향으로 겨냥되면 좋겠다. 적어도 지금처럼 문제의 원인보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일본과 조금이라도 얽힌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그저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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