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아버지는 저 멀리 어딘가를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현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지금 이 순간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다 끝나버렸는데, 지금에 와서 나아질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뭘 하든 그 무엇도 바뀔 수가 없는데 더 이상. 현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는 그 순간 땅바닥을 향해 한숨을 내쉬더니 번개탄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나는 현석을 아버지는 저지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법망을 벗어나 상속될지도 모를 아버지의 사채, 빚 독촉과 함께 현석의 앞으로 청구될 막대한 병원비, 죽을 때까지 찾아올 현석의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 심적 압박, 앞으로의 일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불 보듯 뻔했다. 현석에게나 어머니에게나 죽음보다 못한 삶, 비참한 악몽의 연속일 것이다.
둘은 각자의 차로 걷기 시작했다. 현석은 자신의 차 앞에서 멈춰 서 깨져버린 차창을 지켜보다가 아버지 쪽을 쳐다봤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발길을 옮겼다. 결국 둘은 각자 낡은 경차 양편에 멈춰 섰다. 아버지는 현석을 건너보았다. 현석은 아버지의 눈길을 피했다. 뒷좌석 문을 열려다가 바로 반대편에서 아버지가 문을 여는 것을 보고는 현석은 옆으로 걸어가 조수석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둘은 각자 좌석에 들어가 앉았다. 그렇게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따금 산비둘기가 지저귀며 날아갔고 청설모 한 마리가 차 보닛 위를 타고 지나갔다. 그때 뒷좌석에서 비닐 뜯는 소리가 났다. 룸미러로 아버지가 포장지에서 번개탄을 꺼내고 있는 게 보였다. 아버지는 옆 좌석에 놓인 사각접석쇠를 벌려 번개탄을 끼워 넣었다. 부탄가스에 도치 램프를 끼운 다음 라이터를 켰다. 계속 부싯돌 부딪는 소리만 날뿐 불이 붙지 않았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말했다.
“니 라이터 잇나.”
현석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으나 라이터가 없었다. 아까 아버지가 자신을 차에서 끌어낼 때 바닥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떨어뜨린 장소가 차 바닥이었는지 야영장 땅바닥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현석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정차된 렌트 차량으로 걸어가 바로 뒷좌석 문을 열었다. 다행히 바닥에 라이터가 떨어져 있었다. 라이터를 가지고 경차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좌석에 깊숙이 기댄 채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현석이 문을 열자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현석이 건네는 라이터를 받은 아버지는 곧 라이터를 켰다. 순간 도치 램프 점화구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창문 열렸어요.”
아버지는 반쯤 열린 창문을 확인하고는 락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몇 번을 눌러도 차창이 올라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도치 램프 밸브를 잠그고 나서 락버튼 누르기를 재차 시도했다. 룸미러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석은 운전석 쪽으로 팔을 뻗어 메인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창문은 올라가지 않았다.
“이거 와 이라노. ……차가 오래대서 이라나.”
현석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봤다.
“배선 불량인 것 같은데 드라이버 없어요?”
“배선이 뭐 우째?”
“배선 불량이라고요. 배선하고 스위치 접촉 불량.”
“니는 우예 잘 아노.”
“회사 차 몰 때 이런 적 있어요.”
“무슨 회산데?”
“드라이버 없냐고요. 진짜.”
아버지는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수석 서랍을 뒤졌지만 드라이버를 대체할 만한 다른 도구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차 문을 열더니 바닥으로 상체를 숙여 뭔가를 집어 현석에게 건넸다. 길쭉한 나뭇가지였다. 현석은 어금니를 깨물며 그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계속 메인 락버튼만 만지고 있는 현석을 쳐다보다가 문을 열고 나와서는 갑자기 운전석 문을 열어젖혔다.
“잠깐 비키바라.”
현석은 동작을 멈추고 상체를 슬쩍 뒤로 한 채 아버지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열어젖힌 문을 한 다리로 고정시킨 다음 스위치 테두리 홈에 나뭇가지를 끼워 넣으려 했다. 나뭇가지를 지렛대 삼아 메인 스위치 부분을 떼어내려는 의도였지만 쉽지 않았다. 나뭇가지는 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헛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나뭇가지가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하고 탁하고 꺾여버렸다. 이번엔 현석이 문을 열고 나가 다른 나뭇가지를 주워왔다. 운전석에 앉아 씨름하고 있는 아버지의 손은 나뭇가지만큼 앙상해 보였다. 나뭇가지가 또 다른 나뭇가지를 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답답하네, 진짜. 비켜요.”
아버지와 현석은 양쪽에 선채로 동시에 스위치 테두리 홈을 후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메인 스위치는 떼어지지 않았다. 이제 중고차 시장에 내놔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구형 경차 문짝의 내구성이 이렇게 견고할 줄은 아마 둘 다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도구 자체를 다른 걸로 바꿔야 했다. 머리 부분이 좀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게 필요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마땅한 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현석은 아까 야영장 솔나무 아래에서 주웠던, 지금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는 텐트 못을 기억해 냈다. 그것으로 충분히 될 것 같았지만 부러 꺼내지 않았다. 혹여나 아버지가 그 못을 기억할지도 몰라서였다. 설령 이 못이 그 당시 그 텐트 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게 현석의 혼자만의 착각일지 몰라도, 그때의 그 못과 이 못이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할 만큼 생김새가 유사한 건 사실이었다. 20년 전 그때도 이곳에서 아버지와 분담해서 현석은 텐트를 쳤었다. 아버지가 텐트 못에 줄을 걸어 매듭을 묶으면 초등학생이었던 현석이 텐트 못을 돌로 땅속에 깊숙이 박아 넣는 식으로 둘은 같이 작업을 했다. 현석은 돌을 들고 매듭을 묶는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어머니는 돗자리를 펴고 집에서 싸온 음식들을 꺼내놓고 있던 참이었다. 아버지의 회사 이직 기념으로 가족이 함께 바다로 여행 온 날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이렇게 말을 해본 것도, 서로 같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도 그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하아…… 이런 경우가 다 있노. 내가 와이카노.”
아버지가 운전대에 꽂혀 있는 차 키를 보더니 말했다.
“우야노. 시동을 안 거러뿌따. 요새 정시니 오락까락칸다.”
현석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운전대를 잡더니 차 키를 잡아 돌렸지만 가르릉거리는 엔진 소리만 요란할 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키를 연방으로 돌려대는 아버지를 쳐다보다가 현석이 말했다.
“뒤에서 밀 테니까 핸들 꼭 붙잡고 있어요.”
현석은 한걸음 물러나서는 아버지를 잠깐 본 뒤 바로 뒤쪽으로 걸어갔다. 차 트렁크에 손을 얹고는 소리쳤다.
“지금 밉니다.”
현석이 힘껏 팔과 다리에 힘을 주어 차를 밀기 시작했고 이윽고 차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1, 20미터쯤 이동했을 때 부릉, 시동이 걸렸다.
“돼따. 창문 올라간다.”
현석은 숨을 짧게 내쉬며 뺨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제 돼따. 돼써.”
아버지는 말끝을 흐리며 핸들을 붙잡고 있었다. 그 자세로 한동안 꿈쩍하지 않았다. 기뻐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이 현석의 마음속에서 한동안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