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 30분. 10월의 이 시간은 어둑하고도 맑다. 그래서 퇴근하는 사람들은 기분이 가볍다. 초저녁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강남 상가 어딘가에서 저녁을 해결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 불금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강남역 8번 출구로 나서자 강남대로의 상징, S전자 본사가 눈에 들어온다. 지하도로 빠져나갈 수도 있지만 유독 한 사람, 박 과장은 이 건물 출입구를 이용하는 걸 좋아한다.
"크으, 이 거리. 볼 때마다 질리질 않네." 박 대리, 아니 이제 박 과장이 된 그가 앞서 나가 지도 앱으로 회식 장소를 찾아본다. 고층 빌딩들이 가득한 서울의 야경에 다시금 감탄하며. "여기가 바로 남한의 심장부라는 거야..." 혼자 중얼거리며, 서울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술집에 도착하니 이미 몇몇 동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박 과장님, 여기예요!" 동료들이 손을 흔들며 그를 반긴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바라본다. 남한 술집들은 메뉴가 정말로 다채롭다. 도대체 어떻게 안줏거리가 40가지나 될 수 있을까. 박 과장은 이번엔 골뱅이 무침과 꼬치구이를 시킬까 고민 중이다.
"손님들, 죄송하지만 신분증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주문을 마치자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한다. 다들 회사원처럼 보이는데 신분증이라니.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요? 하하, 칭찬으로 들을게요." 박 과장이 농담을 건넨다.
알바생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죄송하지만 법적으로 모든 손님의 신분증을 확인해야 해서요." 박 과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지갑을 회사에 두고 온 것 같네요.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알바생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이걸로 영업정지를 당한 적이 있어서 꼭 확인해야 해요..."
박 과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주머니를 뒤적였다. "명함이라도 괜찮을까요?"
"죄송합니다. 신분증만 가능합니다."
할 수 없이 박 과장은 안쪽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려권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여권이었다. 알바생은 잠시 멈칫하더니 박 과장이 여권을 펴려는 것을 보며 말했다. "아... 그 정도면 됐어요. 확인 감사합니다."
알바생은 다른 동료들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척하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요즘 어때?" 하는 대화가 나오며 동료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박 과장이 펴다 만 려권에는 붉은 별이 반짝이는 인공기가 숨죽이며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