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준은 아까부터 깨어 있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햇빛이 어른거리는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의 끝자락이 달아나지 않게 붙잡아 두기 위해서였다. 방금 전까지 또렷했던 꿈이 스물스물 뭉개지는 것만큼 찜찜한 일도 없었다.
그는 가물거리기 시작하는 꿈을 조심스레 되짚어 보았다. 평소 그는 꿈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꿈속에 나온 시연은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게다가 시연과의 섹스라니, 참으로 생생한 느낌이어서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근 2년간은 자위할 때조차 그녀를 떠올린 적이 없었고 그녀가 재혼한다는 얘기를 들은 후에는 정말이지 입맛이 가셔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시연의 재혼 때문에 잠시나마 옛 생각이 떠올랐던 걸까? 아니면 이혼 후 3년 동안 마땅한 상대도 없이 자위를 일삼고 있는 석준에게 이제 진짜 여자가 필요해진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 꿈에 다른 의미라도 있는 건가. 그는 나오려는 하품을 꾹 참으며 천천히 햇빛을 피해 돌아누웠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기를 꿈은 상징이라고 한다. 꿈속의 모든 인물과, 사물과, 말과, 행동과, 사건들은 하나같이 재구성되고 연출된 상징들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젯밤 그의 꿈속에 나왔던 시연도 그저 ‘여자’라든지 ‘피곤’이라든지 혹은 ‘욕구’의 상징일 뿐 실제 시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약간이나마 기분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곧바로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쩌면 꿈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의 시연도 애초부터 그저 하나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괴상한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그저 말장난인 것 같아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아도 그럴 듯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절대 통할 수 없는 엄청난 괴리와 차원이 있어서, 서로에게 상징으로서가 아니고는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가정해 보았을 뿐이었다. 과연 우리는 존재하는 능력만큼이나 존재를 인지하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을까? 혹은 반대로 우리는 존재하기 보다는 존재를 주장하는 데 더 혈안이 되어있는 게 아닐까? 석준은 대학시절 심리학 교양과목 시간에 잠깐 배웠던 프로이드 이론을 자신의 꿈에 끌어 붙여 보려다가 문득 그때 심리학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프로이드는 위대하다. 그러나 학자로서가 아니라 연구할 가치가 높은 정신증 환자로서 위대하다. 프로이드는 많은 환자들의 예를 나열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다른 학자들을 위한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세상 누가 프로이드의 처지에서 비켜날 수 있을까. 그 누구라도 결국 바닥부터 의심 받다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어쨌거나 이처럼 신뢰할 수 없는 학자들의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인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고통과 불안을 느낄 때면 이것에 매달리곤 했다. 심리학책에, 정신과 병원에, 전화 상담에 이어 인터넷 상담까지 쏟아져 나오는 실정이었다. 물론 심리학도 점점 보완, 발전하고 있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마치 우주선 설계도처럼 보일 만큼 전문화도 되어 왔다. 만약 언젠가 심리학이 사람의 감정과 정신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사람의 머릿속을 미로가 아닌 지도로서 분명하게 제시해 줄 수 있다면, 인간의 모든 고뇌와 기만은 마침내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전능한 심리학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기는 한 건지 석준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역시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해체해서 부속 하나하나, 모퉁이 구석구석까지 남김없이 살펴보고 싶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기를, 거기에는 어떤 법칙도 일관성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기 마련인 공상을 떨쳐내며 그는 허리께에 덮여 있는 모래색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렸다. 오늘은 일요일이니 오후가 될 때까지 한 숨 늘어지게 자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궁리 저 궁리 하는 통에 바짝 잠이 달아나버린 석준은 눈을 꿈뻑이며 멀뚱히 누워있었다. 베개에 납작하게 눌린 얼굴 옆으로 휑하니 비어있는 더블 침대의 나머지 공간이 마치 드넓은 벌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석준은 그 넓이를 가늠해 보려는 듯 슬쩍 손을 뻗어보았다. 그러나 밤 새 버려져 있던 시트는 싸늘하기만 해서 얼른 다시 손을 끌어당겼다. 만약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천정쯤의 높이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면 그는 스스로가 더욱 한심했을 것이다.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꽁꽁 웅크리고 있는 그가 차지한 면적이라고는 고작 침대 전체의 삼분의 일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그는 이 넓은 침대 한가운데서 버젓이 사지를 뻗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침대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해 보아도 깨어나 보면 어김없이 가장자리 끝에 매달리듯 누워 있었다. 2년여의 짧은 결혼 생활동안 시연과 침대를 나누어 썼던 것이 어느새 습관으로 굳어져 버린 걸까. 아니면 단지 그의 별난 잠버릇일까. 어쨌든 이 더블 침대가 공간 낭비라는 건 그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 오피스텔로 이사 올 때 왜 싱글 사이즈가 아닌 더블 사이즈 침대를 샀는지 그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불을 말아 쥐고 한참을 뒤척이던 석준은 어느새 오른손으로 팬티 속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지금 딱히 기분이 내키는 건 아니었지만 침대에 누워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개운치 않은 기분을 북돋을 거라곤 이정도 뿐이었다. 그러나 맹숭한 기분 탓인지 반응이 영 신통치가 않았다. 더구나 꿈속의 시연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아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엉거주춤 꼼지락거리던 그는 며칠 전 한 포르노 사이트에서 보았던 동영상을 떠올리기로 했다. 동영상을 네 번이나 돌려 보았을 정도로 그는 동영상 속의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하얗고 작은 넝쿨꽃무늬가 하나 가득 수놓아진 보라색 란제리를 입고 싸구려 금색 비닐시트가 깔린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아슬아슬 흘러내려 넓게 퍼져가는 짙은 보라색이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그 위로 하얗게 도드라지는 여자의 작은 어깨는 이빨을 세워 물어주고 싶을 만큼 깨끗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남자만큼이나 짧은 커트머리의 여자는 특별히 여성스럽거나 예쁘장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덤덤한 입맵시라든지 둥근 턱 선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보면서 몸을 잘게 떨었다. 물론 그녀가 보고 있는 상대는 석준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닌 카메라의 검은 렌즈 구멍일 뿐이고, 그 렌즈 구멍 또한 어느 곳으로도 이어지지 않은 불특정한 공허일 뿐이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더 화면 속의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존재와 부재를 능청스럽게 교접시키는 비인격적인 유혹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란제리를 끌어 올려 하얀 다리를 들어냈다. 정말이지 당장 품에 답싹 안아 보고 싶을 정도로 매끈하고 날씬한 다리였다. 그녀의 동글동글한 왼쪽 무릎 위에는 보라색의 작은 도마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무릎 선을 따라 S자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갈퀴가 달린 발과 촘촘한 비늘, 길고 매끄러운 꼬리 등이 꽤나 정교하게 표현돼 있었다. 정말로 하얀 넝쿨 식물 속에서 도마뱀 한마리가 빠져나와 그녀의 무릎 너머로 언뜻 보이는 거무스름한 덤불을 향해 기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석준이 잠시 도마뱀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고 두 다리를 활짝 열었다. 그리고 위협적일 만큼 손톱이 긴 집게손가락으로 천천히 자신의 성기를 열어보였다. 석준은 평면의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불쑥 솟구쳐 오르는 걸 느꼈다. 자신이 덤벼드는 건지 저항하는 건지 불분명했기 때문에, 그리고 인격과 육체가 동시에 자신의 주도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것은 폭력적이었다. 온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만 이마와 턱에는 힘이 빠지고 어쩐지 입에서는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여자가 그런 그를 향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거리낌 없이 함께 죄를 짓고, 모든 걸 용서하고, 자신 안으로 깊이 품어 줄 태세였다. 번개처럼 타오르고 사그라지는 상징들까지 모두 자신 안으로 내던지기를 허락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상징들을 먹어치우고 우리에게 텅 빈 공백의 꿈을 되돌려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랑’이 아닐까? 오직 여자들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던 어느 시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랑은 여성의 성기만큼이나 철저하게 기능적이기 때문이다.
돌연 여자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허리가 올라가고 두 다리가 완전히 양쪽으로 벌어졌다. 석준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아무리 음탕한 순간에도 아름답기만 했다. 그러니 더럽히고 더럽혀도 더 더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안심하고 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녀가 다리를 들썩이자 무릎 위의 도마뱀도 꼬리를 흔들며 펄쩍 뛰어올랐다. 석준은 자신이 한 마리의 보라색 도마뱀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탄탄한 뒷다리로 재빨리 기어가 뜨겁고 좁은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그는 도마뱀처럼 꿈틀거리는 자신의 성기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것은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힘차게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자신의 뿌리를 혐오라도 하는 듯 필사적이었다. 자칫 놓칠 것만 같아 아차 하며 손아귀에 힘을 주는 순간 도마뱀에게 꽉 물린 듯한 아련한 통증을 느끼며 석준은 나직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석준은 한참동안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자위 뒤에는 얼마큼 개운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이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으며 휴지를 풀어 뒤처리를 할 때쯤에는 이미 감쪽같이 김이 세어있기 마련이었다. 사실 그는 성욕이 왕성한 편은 아니었다. 자위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싫증이 나고 지긋지긋한데도 결국에는 틀림없이 굴복하게 되다니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잡힌 도마뱀은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다고 했던가. 잘려나간 꼬리가 한동안 살아서 꿈틀거리다가 죽고 나면 도마뱀에게 다시 새로운 꼬리가 자라난다고 했다. 석준은 욕구란 것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히 힘껏 움켜쥐지도 못한 채,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버리지도 못한 채, 어중간히 잡고 끊어내고 다시 자라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평생 소용도 없는 자위만 하다가 꼴사납게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잠깐 졸았던 것일까. 침대 맡에 두었던 핸드폰 벨 소리에 그는 깜작 놀라 눈을 떴다. 그는 얼떨결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목이 잠겨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 형? 형 저에요. 태우에요.”
잠결이었지만 톤이 낮고 꺼칠한 목소리를 석준은 금세 알아차렸다.
“어, 그래, 오랜만이다.”
태우는 그의 군대 후배로, 그러고 보니 무슨 가게를 새로 개업했다는 얘기를 몇 달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 그동안 미적거렸는데, 아마도 그 얘기를 하려나 싶어 석준은 지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형 생각이 나서 전화 했어요. 왜 저희 가게 한 번 안 놀러 오세요?”
“어어, 그래, 미안하다. 그동안 좀 바빠서.”
“하여간 바쁜 척은 혼자 다 한다니까. 대체 언제쯤 올 거예요?”
“글쎄, 언제가 좋을까.”
“오늘 일요일이라 쉬는 날이죠?”
“어, 그렇지.”
“괜찮으면 오늘 오세요.”
“오늘? 아, 그래, 그러지 뭐. 오후에 갈게.”
“약속한 거죠? 그럼 제가 가게 위치 문자로 보내 줄게요.”
석준은 핸드폰을 끊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참으로 번거롭게 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사타구니를 긁었다. 팬티 속이 한결 헐렁해진 느낌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