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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41)

by 곡도




“대체 무슨 일이야?”

현태가 재차 물었지만 수철은 길쭉하게 입을 다물고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현태도 말없이 하얗게 튼 손등을 긁적이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수철은 겨우 입을 열었다. 놀라울 정도로 가느다란 음성이었다.

“형, 나 돈 좀 꿔줘요.”

“어?”

“돈 좀 빌려줘요.”

그렇게 말하는 수철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현태는 얼떨결에 손을 뻗어 수철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형, 나 돈 좀 꿔줘요. 돈 좀 주세요. 난 이제 망했어요.”

“뭐가 망했다는 건데?”

그러나 현태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결국 일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큰일 났어요. 완전히 망했어요. 나 이제 어떡해요.”

수철은 어린애처럼 온몸을 흔들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후두둑 탁자 유리위로 떨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얘기 해봐.”

“다 개지랄이었어요. 다 사기였다구요. 씨팔, 난 완전히 망했어요.”

수철이 울부짖었다. 그것은 얼핏 언어처럼 들리는 짐승의 소리였다. 의미에게 목덜미를 뜯기는 육성의 비명이었다. 아니, 비명보다는 오히려 웃음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난 끝났어. 이제 완전히 끝났어.”

현태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몇 달 전 바로 이 자리에서 흥분과 열기에 휩싸여 언성을 높이던 수철의 옹골찬 얼굴이 떠올랐다. 왜 그때 자신조차 그것이 사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가게를 부수고 뛰어나오던 수철의 새까만 얼굴을 보자마자 단박에 그것이 사기였다는 걸 알아차렸는데 말이다. 그래, 그게 사기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참동안 머리를 싸안고 울음을 쏟아내던 수철은 꺽꺽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으로 거칠게 얼굴을 훔쳤다. 현태가 휴지 몇 장을 뽑아 주자 수철은 그것을 양 손에 꽉 움켜쥔 채 눈물로 시뻘겋게 달구어진 눈으로 현태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느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형. 저 돈 좀 꿔줘요.”

“어?”

“당장 이대로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어요. 가족들 모두가 빚을 졌어요. 빚이, 그게 하루하루 불어나고 있고, 아니, 매 초마다 불어나고 있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불어나고 있다구요."

수철은 물이 턱밑까지 차오른 것처럼 앞이빨을 드러내며 목을 비틀었다.

"형, 형,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수철이 현태에게 바짝 다가왔다. 현태는 순간 뒤로 몸을 뺐다. 현태 역시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얼마가 필요한데?”

그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태는 후회했다. 그것은 좋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되는 데로, 많이, 많이요. 여기저기서 최대한 끌어오면, 그러니까, 제가 돈 빌릴 수 있는 데를 알아요. 형이라면 꽤 많이 받아낼 수 있을 거예요.”

수철이 휴지를 움켜쥔 두 손을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의 비열한 미소가 묵직하게 현태의 가슴을 때렸다.

“형, 제발 부탁이에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갚을게요. 부모님을 걸고 맹세해요. 진짜에요. 형한테 피해 안 가게 할테니까, 네? 저 아시잖아요. 저 알잖아요, 형. 무슨 일이 있어도 갚을 테니까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제발 한 번 만, 진짜 이번 딱 한 번 만요.”

수철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현태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현태는 그 손을 피했다. 두 사람 모두 당황했다.

“저, 미안하다. 안 될 것 같아.”

“형,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수철이 다시 현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감히 현태의 손을 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형. 제발요.”

“진짜 미안하다.”

“형.”

하지만 현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수철은 눈물에 푹 젖은 속눈썹을 치켜뜨며 현태를 바라보았다. 왜 자신이 이렇게 됐느냐고 또다시 묻는 것 같았다. 현태는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얼마 정도 해줄 수 있는데요?”

현태가 고개를 들어 수철을 바라보았다. 수철은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로 현태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평생 누군가 그를 이토록 똑바로 쳐다본 적은 없었다.

“나한테 얼마 정도 해줄 수 있어요?”

협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수철이 다그쳤다.

“글쎄, 한 300백만 원 정도…….”

현태의 대답에 수철은 잠깐 동안 마비라도 된 듯 꼼짝하지 않더니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날부터 현태는 잠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혹시 수철이 자신에게 해코지라도 할까봐 두려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왜 자신이 죄인처럼 도사려야 하는 건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은 수철에게 조심하라고 주의까지 주지 않았나. 그런 자신을 소인배 취급하며 비웃은 건 오히려 수철이었다. 심지어 수철은 자신까지 이 사기극에 끌어들이려고 안달이었었다. 그 때 수철의 말을 따랐다면 지금쯤 어찌 됐을지 현태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말하자면 현태는 수철에게 아무 것도 거리낄 게 없었다. 하지만 이 분명한 사실이 자신에게처럼 수철에게도 분명할까? 가끔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사소하기 그지없는 실망과 오해, 혹은 근거없는 분풀이가 얼마나 쉽게 끔찍한 사건의 발단이 되던가. 그는 혹여 수철과 마주칠까봐 가슴을 졸이며 가게 밖을 살폈고 어딘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곤 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현태는 모텔에서 만난 오마담에게 수철이 사기 당한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다만 며칠 전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왔었던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어머머머, 웬일이니? 그게 진짜야? 아유, 세상에, 이제 수철씨 어뜩하냐? 쯧쯧, 내가 그 인간 돈 찢으면서 지랄발광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그렇게 설쳐대더니 결국에는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팠네, 팠어. 누굴 탓하겠어. 지 팔자 지가 꼬는 거지. 하여간 분수도 모르고 욕심이 과하면 결국엔 탈이 나는 법이야.”

마담의 호들갑에 현태는 으쓱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정한 말에 기분이 상했다. 운이 나빠 함정에 빠진 것일 뿐 수철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변호해 주고 싶은 변덕이 현태의 가슴 한편에서 꿈틀거렸다.

“어떻게 해서든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는데.”

현태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담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다 말고 파리라도 쫒는 것처럼 한 손을 휘젓더니 현태의 허벅지를 짝 소리 나게 내리쳤다.

“아유, 됐어. 현태씨가 뜯어 말렸는데도 자기가 박박 우겨서 한 일이라며. 원래 눈이 뒤집힌 사람은 지 애미 애비도 몰라본다니까. 부모도 못 말리는 걸 누가 말리겠어? 현태씨는 할 만큼 했어.”

마담이 그의 턱을 잡고 가볍게 흔들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지만 현태는 내심 뜨끔했다. 자신이 정말 수철을 ‘뜯어’ 말렸는지 분명치 않았다. 사실 몇 마디 의례적인 걱정만 늘어놓았을 뿐 어물어물 수철이 하는 대로 방관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남의 인생이 통째로 뒤집어지는 결정적인 찰나에 대체 누가 함부로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 혹여 무슨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내심 잠자코 기웃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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