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말당초 군벌 쟁투, 대당제국 창업기
수나라 말기.
망국의 황제가 그러하듯 양제는 쾌락과 사치를 즐기는 탕아였다. 그는 수도인 장안과 제2수도인 동도(낙양)를 버리고, 황후의 고향인 강도(양주)에 주저앉아 국정보단 쾌락을 추구했다.
좀 더 역사학자의 의견을 빌려 달리 서술하면 이렇다. 북방에선 돌궐 등 변방의 세력이 커져서 위험해졌고(사실 수나라 이전까지 지난 몇백년간 모두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세력에 강북은 점령되어왔다), 나라의 국운이 기울자, 반란의 기미가 늘어났다. 그러자, 수양제는 장안과 낙양에 각각의 자신의 혈육(손자)들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고, 자신은 자칫 강남으로 내려가 버틸 수 있는 강도까지 차지하여 대비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기다, 수나라는 계속되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과 거듭되는 실패로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었다. 백성들은 군대에 징집되거나 전시재정을 뒷받침하느라 삶은 매우 핍팍해졌다. 그러던 때, 고구려 정벌군의 보급을 담당하던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킨다. 양현감의 반란을 기점으로 여기저기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양현감 아래에는 이밀이라는 자가 있었다. 이밀은 양현감에게 3가지 계책을 제시하였다.
상책으로, 계주(지금의 천진)로 처들어가서 아래로는 황제가 있는 강도를 압박하고, 위로는 요동에 있는 수나라 군대의 뒤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러면 요동정벌군은 전방에 고구려군과 후방의 양현감 군에게 갖히게 되고, 양현감 군대가 보급를 끊어버리면, 한달 이내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요동군을 흡수하여 세를 불리고 강도를 공략하면 된다는 것이다.
중책으로는, 황제가 비어있어 무주공산인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천혜의 요새들로 둘러쌓인 관중 내, 장안에 틀어앉아 만전을 기하며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책으로는 가까이 있고 또다른 천혜의 요새인 동도(낙양)를 먼저 점령하고, 인근의 최대 군량저장소라는 흥락창을 확보하여 재정을 불리는 것이다.
돼지목에 진주목걸이였던 것일가? 양현감은 이밀의 빼어난 전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하책을 택하기로 한다. 그 뒤로도 이밀이 여러 좋은 계책들을 건의하지만 양현감은 채택하지 않았다. 여기서 회의를 느낀 이밀은 양현감에게서 떠났다. 그 뒤 양현감 세력은 수나라 군대에게 패하여 죽음을 당한다.
이 뒤로 수나라 말기에는 여러 군벌이 탄생하였고, 잔존하는 수나라 정부군과 더불어 난립하게 되었다.
난립하는 여러 군벌들 중에서, 먼저 두건덕을 들 수 있다. 두건덕은 하급장교 출신이었으나 도적 때로 시작하였으나 매우 유력한 군벌로 성장하였다. 낙수를 근거지로 화북에 자리를 잡고 수군들을 물리치며 강력한 군벌을 형성했다. 실제로 두건덕은 여러 군벌들 중에서 관할 내 백성을 잘 다스려서 덕망과 함께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훗날 하국이라 칭하고 독립된 세력으로 자리잡는다.
또하나의 유력한 군벌로서는, 앞서 말한 이밀이 세운 위국이다. 이밀은 양현감에서 벗어나 기회를 엿보다가, 따로 군대를 일으켜 낙양주변에 자리잡는다. 그런데 이밀은 양현감과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지리적으로 가깝고 군량이 풍부한 흥락창을 그냥 둘 수 없었다. 흥락창은 수양제가 강남의 산물을 강북으로 옮기기 위해 양자강을 황하에 연결한 교차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가장 풍부한 물산을 보유한 지역이었다. 재정을 얼마나 확보하느냐는 얼마나 강한 군대를 키워낼 수 있는가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흥락창 인근의 천혜의 요새인 동도(낙양)를 빠르게 차지하고자 동도를 공격했다. 그러나 동도에는 수양제의 혈족인 월왕이 격렬하게 사수하고 있었다. 이밀은 승승장구하며 세력을 키워왔고 자신감에 차서 낙양을 공타했지만, 낙양은 천혜의 성벽이라 쉽게 점령하지 못하였다.
강도(양주)에서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수양제는 서역출신의 장수 왕세충을 급파해 낙양을 지원하게 한다. 그러나 음흉하다고 알려진 왕세충은 낙양에 들어와 도리어 낙양을 차지하게 되고 스스로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왕세충까지 가세된 낙양은 더욱 점령하기 힘들어지고, 의외의 저항에 이밀은 낙양을 공타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밀이 낙양에 몰입하고 있던 시기에, 변방 태원에 있던 이연과 그의 아들 이세민이 이 때를 틈타 빠르게 군대를 일으켜 수도 장안을 점령하였다. 무주공산과 같던 장안을 쉽게 점령하여, 수도를 틀어쥐고 관중이라는 요새에 들어앉아 당나라를 세우게 된다.
처음에 이연은 쿠테타에 대해서 두려움과 주저함이 많았으나 이세민과 유문정이 아버지를 설득하고 계교를 부려 결국 이연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연 세력이 발원한 태원은 북방 돌궐과 맞닿는 국경지역이었다. 초기 이들이 남하하려는 시기의 국면을 보면, 후방에 거대한 돌궐세력이 있었고, 남쪽에는 여전히 이밀이 왕성하게 낙양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비족 후손이던 당태조 이연은 돌궐의 위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당대 돌궐은 아시아대륙 최고의 군사강국이기도 했다. (잠시 수나라에 의해 분열괴멸되었다가 수나라가 분열되자, 다시 돌궐은 강성해졌다.)
이연은 먼저 돌궐의 사필가한에게 신하를 자청하여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돌궐로부터 병력을 지원받는다. 이 돌궐부대는 장안을 장악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또한 이연과 이세민이 장안으로 진격하려면 이밀의 영역을 스쳐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연은 당시 위국왕으로 칭하고 있던 이밀에게도 머리를 숙여 신하를 자청한다. 이렇게 북부의 돌궐과 이밀로부터 위협을 방비한 뒤로, 차례차례 주요 관들을 격파하며 결국 수도 장안을 차지하게 된다.
한편, 강도에 자리잡고 있던 수양제의 타락은 수왕조를 지지하는 신하들에게는 목불인견의 장면이었다. 그 불만이 커져가자 수나라 대신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그 선두에 우문화급을 앞세운다. 일설에 따르면 수양제는 목욕하다가 우문화급의 무리들에게 살해당하고 이렇게 수왕조의 마지막 황제는 목숨을 잃는다.
그 뒤, 우문화급은 쿠테타를 도와준 사람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강도에 있던 수나라 황실근위군을 장악하게 된다. 결국, 우문화급은 강도에서 벗어나, 군대를 이끌로 장안을 향해서 나아가기로 한다. 우문화급은 나라이름을 허로 칭하고 스스로 허왕이라 했다.
사실, 우문화급의 허국 뿐 아니라, 이연의 당국, 이밀의 위국, 왕세충의 정국, 두건덕의 하국, 형주에 자리잡은 주찬은 초국, 강릉에 자리잡은 소선은 양국이라 칭하며 저마다 독자세력을 형성하여, 이미 군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수나라는 수백년의 혼란을 통일하였지만 불과 30여년 버티다가, 다시 여러 군벌들로 나뉘어 다투는 시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마치 과거 항우가 초왕을 시해함으로써 전국의 역적으로 몰려 공타를 받은 것처럼, 직접 수양제를 시해했다는 이유만으로 저마다 반란을 일으켜서 난립하던 군웅들에게 우문화급의 처단은 좋은 대의명분이 되었다. 즉, 수나라에 항거했던 반란세력들이 저마다 우문화급을 역적으로 몰아붙이며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뭉친다.
강도(양주)를 벗어나 북상하던 우문화급 세력은 하북의 두건덕과 먼저 맞부딪치게 된다. 우문화급의 허국과 두건덕의 하국이 맞붙는 가운데, 역적 우문화급을 토벌함으로써 대의명분을 얻기 위해, 당국의 이세민 역시 우문화급을 토벌하러 가담하고, 위국의 이밀도 토벌군을 이끌고 우문화급을 압박해왔다.
자, 이제 우문화급의 세력은 어찌될 것인가?
이세민은 수말 군벌들이 난립하던 세력들을 하나하나 격파하고 당국의 기초를 수립하는데, 그 이야기는 2부에서 이어서...
-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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