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20 케냐 키갈리
Bg. 이렇게 우리 - 백아연
케냐의 키갈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3주간의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의 일손을 돕고, 장애아동 생활시설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았다.
점심을 먹고 난 후 2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학교 쉬는 시간을 틈타 카롤이 찾아왔다. 카롤은 유독 나를 따르던 8학년 소녀였다. 학교에서 나를 보면 먼저 다가오는 나를 너무나 좋아해 준 친구였다.
마당 옆의 낮은 턱에 주저앉아 잠시 쉬고 있었는데, 카롤이 내 옆에 따라 앉았다. 늘 그렇듯 우리는 맘보(안녕, 어때?) 포아(좋아) 인사하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이제 무얼 할 건지, 교실로 언제 돌아가는지. 매일 비슷한 질문과 대답을 지겹지 않다는 듯 정답게 주고받았다. 나는 종종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잡은 손을 흔들어주거나, 하이파이브를 하는 정도의 손장난이 다였다.
잠시 후 카롤은 주머니에서 주섬 주섬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꺼내보인 손 안엔 종이 몇 장이 있었는데, 그중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한 장을 꺼내더니 나는 볼 수 없게 종이를 살짝 펴서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감춘 종이가 무엇인지 물었다. 쑥스러운 듯이 망설이더니 이내 두 손으로 종이를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펼쳤다. 자기 코앞에 종이를 들며 얼굴을 가리는 그녀의 이상한 행동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종이에 쓰인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I miss mum, 이라고 빨간색으로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쓴 글이었다. 편지를 읽으며 코 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차오르는 눈물을 막으려고 입을 앙 다물었는데 편지 뒤의 카롤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참으려고 했는데 참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I miss mum
A thousand words could not bring you back. I know because I tried. A thousand tears could not bring you back. I know because I cried.
천 마디의 말로는 당신을 되찾을 수 없어요. 노력해서 알아요. 천 마디의 눈물로도 당신을 되찾을 수 없어요. 노력해서 알아요.
I really miss you mum, tell me. I miss you mum, Although your soul is at rest and your body free from pain. The world would be like heaven if I had you back again.
비록 영혼은 안정되어 있고 몸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만 다시 당신이 돌아온다면 세상은 천국과 같을 것입니다.
You’re always in my thoughts no matter where I go. Always in my heart, because I loved you so much. However long my life mights last, wahtever land I view, Whatever joy or grief is mine, I still remember you
당신은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내 마음속에 있어요. 내 삶이 얼마나 오래갈지, 내가 어떤 땅을 보든, 어떤 기쁨이든 슬픔이든, 나는 여전히 당신을 기억해요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그녀와 함께했던 일주일 남짓의 지난 시간이 우리 사이에 무엇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며칠 전 카롤은 물었다. 이곳에 언제까지 있는지. 나는 다음 주에 떠난다고 답했다. 다음 날 카롤은 물었다. 케냐에 더 오래 있으면 안 되는지. 나는 한국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다음 날 때쯤 카롤은 또 물었다. 왜 한국으로 가야 하는지.. 나는 한국에 가서 공부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제저녁 나를 찾아온 카롤은 망설이다가 자기와 여기서 살면 안 되냐고 물었다. 나를 자꾸 붙잡으려 하는 카롤에게 한국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에 또 케냐에 올 거냐는 묻는 말에,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고, 우리에겐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고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카롤은 오늘 나에게 그 쪽지를 전해줬다.
나는 그 종이가 언제부터 그녀의 주머니에 있었는지, 그녀가 나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리고 전해주기 위해 얼마나 망설였을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카롤을 떠올리면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알 수 없는 형태로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얼마의 시간을 같이 보내야 서로를 정들게 하고,
얼마만큼의 대화를 나눠야 서로를 잘 알게 되고,
얼마만큼의 감정을 공유해야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내가 카롤과 함께한 시간과 대화와 감정이 과연 얼마나. 였기에 나는 이 휘몰아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카롤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에서 그리고 그녀의 편지에서 느껴지는 그 작고 소중한 진심이 너무나 또렷해서 나는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케냐 작은 마을의 카롤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