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여름방학, 서울에서 온 친척 동생이 내게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알록달록한 사각형 그림들이 페이지마다 그려진, 빨간 표지의 책이었다.
그림만 가득하길래 미술책이냐고 물었더니 그 애는 미술책이 아니고 매직아이라고 했다.
마술처럼 그림이 튀어나오는 책이라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설명에 놀라기도 애매했다.
그 애는 책을 펼쳐 눈앞에 가까이 가져갔다가 천천히 다시 책을 멀어지게 했다.
“이렇게 보면, 언니, 이 그림에서 토성이 튀어나오거든. 와, 진짜 예뻐. “
토성이 튀어나온다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뭐가 보인다고 말을 하니까 궁금해졌다.
나는 그 애가 한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다.
양손으로 빳빳한 책을 펼쳐 들고, 팔을 구부려 눈 가까이 책을 가져왔다가 다시 천천히 앞으로 밀어냈다.
토성이 어디에 있어, 뭐가 튀어나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애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이 책의 앞부분을 펼쳐주었다.
“언니, 여기, 매직아이 보는 방법이야. 여기 가운데, 이 동그란 점 두 개가 세 개로 보이게 만든 다음에 책을 멀리 보면서 튀어나온 그림을 찾아봐.”
얼굴 가까이에 책을 놓고 두 점을 흐리고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곧 점이 네 개로 갈라졌다.
몇 번의 연습 끝에 점 네 개가 세 개로 모이는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멀리 보는 느낌으로 가까이를 보는, 보이게 안 보이는 느낌으로 눈을 떠야 하는 거였다.
그 상태를 간신히 붙잡아 책을 멀리 놓고 전체 그림을 보았다.
배경이 멀리 밀려나고 가운데 토성만이 가까이 아름답게 떠있었다.
정말 이건 매직아이, 미술책이 아닌 마술책이었다.
그 순간에 이 빨간책이 너무나 소중해졌다.
페이지가 구겨질까 조심스레 넘기며 다른 그림들도 찾아보았다.
반복되는 묘한 그림 속에서 하트, 장미, 자동차, 빗자루를 탄 마녀, 물을 뿜는 고래가 솟아 나왔다.
차원이 다른 신비한 세상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1993년 여름, 우리 동네에서 매직아이 책을 제일 먼저 갖게 된 건 나였다.
우리 집 마당엔 늘 동네아이들이 놀러 왔는데, 그 여름엔 마당에서 다 같이 빨간 매직아이 책을 감상하곤 했다.
처음에, 종이에서 그림이 어떻게 튀어나오냐고, 안 속는다고 큰소리를 치던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점 세 개 만들기를 연습하는 애들 뒤에 서서 슬쩍슬쩍, 연습이 아닌 것처럼 연습을 했다.
그러다 튀어나온 그림을 보게 된 순간 흥분을 참지 못하고, 보인다, 보인다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튀어나온 모양을 보게 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그림을 보면서 다 같이 상상하면 모두 다 재밌으니까.
드디어 다 함께 같은 그림을 여행하며 한 줌 한 줌 상상을 더해나갔다.
“산 너머에 이런 세상 있을지도 몰라.”
“맞아, 점을 세 개로 만들어야 보이는 세상이 확실히 있을 거야. “
”거기 하늘엔 이런 고래가 살아. “
”물을 뿜으면 비가 오는 거 맞지? “
”맞아, 거긴 달이 이 토성 모양이고, 달보다 훨씬 크게 보여.”
그렇게 한참 놀다가, 매직아이 그림이 다른 곳에도 숨어있을지 모른다고 찾아 나섰다.
주목나무껍질, 할머니 블라우스, 담벼락 페인트 벗겨진 곳, 친구네 벽지, 우리 집 천장, 친구 언니가 산 포장지...
뭐, 숨은 그림은 없었지만, 점 세 개 만드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면, 그곳이 어느 순간 훨씬 더 멀고 더 깊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환상에 잠기기 딱 좋을만큼.
책 한 권으로 차원을 넘나든, 매직서머, 1993년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기에는 뭐가 보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