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며칠 후, 동수는 홀로 집을 정리했다. 아버지가 떠난 집은 이전보다 훨씬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그들의 집은 항상 조용한 곳이었다. 말없이 눈빛만으로 소통하고, TV 소리나 식탁 위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이 간간이 공간을 채우던 날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서자, 이상하리만큼 방 안의 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침대 매트리스는 한쪽이 움푹 꺼져 있었고, 눌린 자리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자국은 마치 아버지의 체온이 아직도 그 안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협탁 위에는 안경과 약봉지, 그리고 닳은 물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랍을 하나씩 열며 남겨진 물건들을 살피던 동수는, 협탁 안쪽 깊은 곳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얇고 손때가 묻은 표지, 구겨진 모서리. 수첩 사이에는 종이 몇 장이 끼워져 있었고, 그것을 펼치는 순간 동수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 오래된 병원 서류였다. 바랜 기록지의 상단에는 또렷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좌안 망막 파열. 기구(포크)에 의한 외상. 식사 중 사고. 당시 3세 남아와 함께 있음.”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동수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손끝으로 문서의 끝자락을 살짝 접었다.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세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방 안에서, 그 고동 소리만이 뚜렷하게 울렸다.
기억은 조각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식탁, 넘어진 반찬그릇, 바닥에 떨어진 포크. 그 조각은 날이 서 있었고, 그가 기억의 가장자리를 더듬을수록 날카롭게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튄 팔. 날카로운 비명. 당황스러움과 피. 그리고 말없이 등을 돌리던 아버지의 뒷모습.
세 살,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는 그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그런 기억은 애초에 머릿속에서 지워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날의 어떤 감정, 벽처럼 느껴지던 공포와 싸늘한 침묵은 몸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기억은 모호했지만, 정서는 정확했다. 그것은 ‘죄’라기보다 ‘흔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무엇인가가 확실히 변해버렸다는 감각.
그는 조용히 부엌으로 걸어갔다. 수저통 앞에 멈춰 서서, 오래된 은색 통을 열었다. 숟가락, 젓가락. 그 속에는 익숙한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포크는 없었다. 문득 확신처럼 다가왔다. 포크는 그날 이후로 사라졌던 것이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일은 가족 사이에서 말해지지 않았다. 어떤 사과도, 설명도, 책임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동수는 그저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는 포크를 없앴다. 말없이.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동수를 길렀다.
그는 손을 뻗어 수저통을 닫았다. 손끝에 닿은 차가운 금속이 마치 과거의 잔해처럼 느껴졌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춰진 것. 버려진 것이 아니라, 묻어둔 것. 그는 한참을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등을 등불 삼아 비추던 오후 햇살이 점점 기울었고, 부엌 안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포크 하나 없는 서랍이, 문득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그 빈자리가 지금까지의 시간 전체를 상징하는 듯했다. 말로 채워지지 않았던 수많은 감정들, 고백되지 못했던 분노와 슬픔들. 그 침묵이, 그 공백이, 그 시간들이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동수는 입을 꾹 다문 채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말 대신, 오래도록 눌러두고 있었던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울음을 품듯 일렁였다.
양로원의 오후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낙엽을 천천히 밀어내고 있었고, 느슨한 가을 햇살이 드리워졌다. 간헐적으로 휠체어가 지나가는 소리와 간병인의 낮은 말소리가 섞여 들렸다. 동수는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향했다. 아버지는 양로원 입구 쪽 벤치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살짝 기울어 있었고, 햇살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눈은 이미 세상을 보지 못했다. 완전한 실명. 아버지의 세상은 이제 빛조차 닿지 않는, 침묵과 어둠의 깊은 내부에 있었다.
동수는 몇 걸음 떨어진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이제 어색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사람, 보지 못하는 사람. 그가 평생을 살아온 방식이었다. 침묵과 어둠은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몸에 익혀온 언어였다.
동수는 자신의 인기척을 드러내지 않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양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가벼운 기계음과 낡은 스트랩이 손등을 스쳤다. 이토록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를 렌즈에 담고자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수히 많은 타인의 얼굴을 찍어왔고, 그들 속의 감정과 빛의 흔적을 기록해 왔지만, 단 한 번도, 그 얼굴은 찍지 못했다. 아니, 찍을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동수는 조심스럽게 셔터를 준비했다. 숨을 고르고, 구도를 잡고, 초점을 맞췄다. 아버지의 얼굴은 정면이 아니라 측면이었고, 햇살이 비스듬히 그의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눈꺼풀은 천천히 떨리고 있었고, 손등 위엔 잔주름이 겹겹이 얹혀 있었다. 무릎 위로 얹힌 담요는 바람결에 살짝 흔들렸다. 모든 움직임이 느렸다. 느리되 정직했고, 그 느림 속에 무수한 세월이 쌓여 있었다.
그는 말로 할 수 없었던 모든 감정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다. 사물의 결, 빛의 밀도, 침묵의 모양. 그것은 오직 사진으로만 기록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아버지는 늘 보지 못했고, 말하지 못했고, 감정을 외면했던 사람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동수는 자랐고, 자라는 내내 설명되지 않는 슬픔을 짊어져야 했다.
찰칵. 첫 번째 셔터가 눌렸다. 아버지는 미동도 없었다. 여전히 햇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두 번째 프레임은 손등이었다. 잔주름 사이에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프레임. 동수는 아버지의 얼굴에 다시 초점을 맞췄다. 구도는 어딘가 기울었지만, 그는 그것조차 수용했다. 완벽한 프레임이 아니라, 진짜를 찍고 싶었다. 아버지를. 이 사람을. 이 시간 안에서.
그 순간, 렌즈의 한쪽이 갑자기 뿌옇게 흐려졌다.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비볐다. 그러나 문제가 렌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곧 알아차렸다. 자신의 왼쪽 눈이,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천이 드리워진 것처럼 시야가 반쯤 사라졌다. 남은 절반은 여전히 또렷했고, 그 경계는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동수는 천천히 카메라를 내렸다. 손끝이 떨렸고, 입술이 바르르 마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어 박자 빠르게 뛰었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시야는 그대로였다. 렌즈가 아니라, 그의 눈이었다. 아버지처럼, 그의 세계도 이제 서서히 닫히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똑같은 자세, 똑같은 방향. 여전히 햇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을 향하는 그 자세는 마치 평생을 살아온 방식 그대로, 끝까지 살아내겠다는 의지처럼 보였다.
그 순간, 동수는 떠올렸다. 말없이 등을 돌리던 뒷모습. 식탁 위에 놓였던 넘어진 반찬그릇. 떨어진 포크. 피. 그리고, 다시 돌아와 아무 말 없이 그를 감싸 안았던 손. 아버지는 분노했고, 동시에 사랑했다. 단 한 번도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그 사랑은 무언의 행위로 스며 있었다. 그 분노는 상처를 남겼지만, 그 침묵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를 지켜왔다.
아버지가 포크를 없앴던 것도, 식탁을 침묵으로 가득 채웠던 것도, 결국은 자식에게 상처를 각인시키지 않으려는 방어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고, 대신 감추는 법으로 사랑을 남겼다.
동수는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흐려진 시야 너머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형체처럼 아득했고, 동시에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 지금 그가 찍고 있는 건 단순한 얼굴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였다. 시간이 만든 침묵의 풍경, 오해와 회한, 그리고 아직도 말해지지 않은 사랑의 결.
찰칵. 마지막 셔터가 울렸다. 동수는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사방은 조용했다.
햇살은 여전히 두 사람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는 보지 못하는 사람과, 이제 막 보이지 않기 시작한 사람 위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