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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하면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by 안영회 습작

지난 글에 이어 <사람에 대한 예의> 2부 <어둠 속, 갑자기 불이 켜지면> 중에서 <좀비 공정>을 읽고 밑줄 친 문장을 중심으로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약자를 위험한 공간으로 몰아넣는 좀비 공정

밑줄 친 문장들을 읽으며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저자의 솔직함에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나의 법조기자 생활은 그렇게 처참하고 혼란스럽게 시작되었다. 그 길고 길었던 하루는 내게 '검찰 기사를 물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줬다. 법조팀에서 일하는 내내, 다음날 아침 다른 신문에 무슨 기사가 나올지 겁나고 무서웠다.

책을 읽으며, 무심코 넘겼던 '좀비 공정[1]'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비로소 곱씹어 보게 되었습니다.

좀비 공정은 공식적인 작업 공정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위험한 공정을 말한다. '좀비'라는 수식어를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죽었지만 살아 있는 좀비의 특징은 세 가지다. 1. 계속해서 비틀거리며 걷는다. 2. 살아 있는 것은 뭐든지 물어뜯는다. 3. 생각을 하지 못한다. 뇌에서 생각하는 영역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700페이지가 넘는 자료가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 2019.9>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습니다. 소수만 읽을 것으로 보이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가 지난하지만 한편으로는 작동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한 장면으로 느껴졌습니다.[2]


스스로는 좀비 공정을 벗어날 수 없는 법조기자들

저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기자라는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인 이들의 공통점을 꿰뚫어 보는 탁월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법조기자로 일했던 나도 좀비 공정에 갇혀 있었다. 1. 계속해서 쫓기듯 허겁지점 일했고, 2. 검찰 시각에서 피의자를 마녀 사냥했고, 3. 기사를 작성하면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시각각 기사를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물먹지 않기' 위해, '깨지지 않기' 위해 넘어질 듯 말 듯 비틀거리며 달리기를 매일 거듭했다. 선배들이 물려준 좀비 공정 밖으로 뛰쳐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故 김용균 사망사고에서 비롯된 '좀비 공정'이라는 개념이 법조기자에게 적용될 때는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행태를 듣고 나니, 익숙한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조국 사태'나 '기레기'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면 당시의 모습을 담은 낯익은 사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법조기자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좀비 공정'

기자들 스스로는 그 '좀비 공정'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는 책을 통해 짐작할 뿐, 제가 기자들의 세계를 직접 아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을 하면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

이어지는 단락을 읽으며, 이전에 읽었던 책 『WHY』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이들이 좀비 공정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그 일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비가시화된 위험'을 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돈의 중력', '가면의 내면화'와 같은 개념들이 그러했습니다. 『WHY』에서는 '좀비 공정'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같은 현상을 다른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두 저자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돈의 중력'에 굴복하고 생각을 멈춰야만 조직에서 생존할 수 있게 되는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이를 독자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바빠서 '생각을 못 하는' 측면도 있지만, 생각을 하면 피로워지기 때문에 '생각을 안 하게' 된다. 생각을 하면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부 평가나 승진과 관련 없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일을 잘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 <중략> 이러한 좀비 공정은 의도적으로 조장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누구든 좀비 공정 속에 집어넣으면 제시된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게 된다. 변혁을 꿈꾸지도, 반란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극한 경쟁이 유착과 부실을 부추기는 직무 현장

다시, 저자의 법조기자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때 그 검사들은 기자들을 어떻게 여겼을까. 입 벌리고 먹이 달라고 졸라대는 병아리들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검사들과 "잘 지내는' 것은 특종과 낙종이 매일 포탄처럼 터지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제1 조건이었다. 살아남는다는 표현이 이상하다고? 회사에서 "일 못한다", "무능하다"라고 욕먹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문득 '출입처'라는 단어가 떠올라, 인공지능에게 '출입처 기자 문제가 권언유착과 관련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출입처 기자 문제는 언론과 권력(정부, 공공기관, 대기업 등) 사이의 유착을 구조적으로 강화시키며, 이는 권언유착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현상은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출입처 제도가 권언유착의 온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IT 컨설턴트로 일했던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유착'이라고 할 순 없어도 생존을 위해 따라야 했던 업계의 관행이 기자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러한 모습, 나아가 유착이라 불릴 만한 관행이 업계에 여전히 남아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환경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어쩌면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지적 검찰시점은 시민의 힘으로 개혁되기 직전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땐 알지 못했다. 그런 나와 기자들의 일상이 검찰 권력을 완성시켜주고 있음을, '검찰은...', '검찰에 따르면...', '검찰은 ...할 방침이다', '검찰은 000의 진술을 확보하고...', 전지적 검찰시점으로 사건을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했다.

군부독재 시절이 끝난 후, 검찰은 우리 사회 최고의 권력 집단으로 자리 잡았을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 시절 故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검찰 권력의 행태를 처음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이 검찰 권력의 폐해를 절감하게 된 것은 조국 사태와 현 대통령의 취임 과정을 거치면서였을 것입니다. 전통 언론이 외면받고 기자들의 역할 상당수가 유튜브 플랫폼으로 넘어간 2025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바로 다음에 인용할 그들의 습관적인 업무 방식이 자초한 결과일 것입니다.

수사를 받는 피의자의 해명을 마지못해 달았지만 기사 앞 쪽에 나열된 혐의와 의혹들을 '1'도 해명하지 못했다. 취재 경쟁은 단편적인 팩트를 확보하는 데 집중됐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설익은 기사들을 끝없이 납품했다. 공정 보도나 언론의 책임 같은 가치는 저 멀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다행히 이 글을 쓰는 지금, '전지적 검찰 시점'으로 대변되는 검찰의 막강한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바로 그 '전지적 검찰 시점'을 이용해 여론을 오도함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현재는 내란 혐의까지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제압되었으며, 이제 시민들의 가장 높은 지지를 받은 정치인이 대통령 취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몸담은 조직과 환경 속에서, 혹시 '생각하기를 멈춰야만 살아남는 구조'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석

[1]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으로 한자사전을 찾습니다.

[2] 그리고, 더디지만 앞으로 가는 민주주의를 또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튜브 영상에 따르면 노동자 출신의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자 마자 故 김용균 사망사고와 매우 유사한 일이 벌어졌고, 새로운 당선자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진일보한 대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3]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단락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를 읽고 쓰는 독후감

1. 비극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라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2. 인간이라는 한계, 인간이라는 구원

3. 악(惡)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고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4. 자신만의 기억을 위해 싸울 때 당신은 인간답다

5. 나는 나로 살아야 숨통이 트인다

6. 사랑은 우릴 어디론가 데려다줄 것이다

7.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곧 나를 이야기한다


지난 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연재

(13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36. 비극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라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137. 운명, 연기(緣起), 확률 분포 그리고 테라포밍

138. 인간이라는 한계, 인간이라는 구원

139. 아차, 바로 이런 상태가 감정의 덫에 걸려든 상태지

140. 경험의 해체와 인간 관찰력의 한심함에 대하여

141. 악(惡)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고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142. 원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들과 역사적인 연금술

143. 자신만의 기억을 위해 싸울 때 당신은 인간답다

144. 시각이 세상을 충실하게 표현한다는 널리 퍼진 착각

145. 나는 나로 살아야 숨통이 트인다

146. 사랑은 우릴 어디론가 데려다줄 것이다

147. 우리는 실제 세상이 아니라 뇌가 보여주는 것을 인식한다

148.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곧 나를 이야기한다

149. '왜'라는 질문 없이는 불가능한 지속 가능성

150. 준비가 아니라 나를 알고, 나를 믿고, 해 나가는 것

151. 뇌가 추측을 최대한 동원해서 정보를 더 크게 키운다

152. 확신이 없는 길을 가는 방법은 나 자신을 믿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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