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시작은 칠판 대신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에 이어 WHY의 <Life 죽음 속의 생명>을 읽고 밑줄 친 내용을 토대로 생각을 기록한 글입니다.
아래 다발말[1]을 읽을 때 육아 경험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우리는 부자로 태어나 가난하게 죽는다. 유일한 존재인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 저마다의 사랑스러운 것들에 주목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모래사장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개성을 세포가 기억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놀랍게도 중국에서 '개취인정'을 시작한 후로 주변 사람들의 자기 발견을 돕고 있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본성을 스스로, 그리고 서로 바라봐 주며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입으로 '자아실현'이라는 말을 자주 하긴 했지만, 사실 무의식적인 이끌림에 의한 행동이었습니다. 마침 이 책을 읽을 때 제가 그렇게 행동해 왔다는 사실을 생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저는 그 활동에 나름의 이름을 붙였는데, 바로 '사랑방'입니다.
하지만, 다음 다발말을 보며 아직 스스로 잘 모른다는 사실도 시인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지고 태어난 본래 모습이 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오직 나의 것이다. <중략> 내가 어디서 와서 왜,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나를 질정한 풍요로 인도하는 여정의 시작이다. <중략> 각자가 찾은 각자의 렌즈가 서로의 발견을 도울 것이다.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질문하는 능력 <중략> 협업하는 능력이 물질이 넘치는 풍요의 시대에 서로를 존재적 빈곤으로부터 구해 줄 능력이다.
'직면'은 저에게도 오래전부터 훈련 항목이었기 때문에 이를 나눠주려고 하면 사람들이 외면한다는 사실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대부분은 문제를 직면하는 대신 질문자인 나를 설득하기 위한 답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 아빠의 미래 설계(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6)>의 말을 빌면 '안정이라는 미신'을 택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기면이다. 내가 거울처럼 바라보고, 나 자신으로 인식하는 가면이다. 그래서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하지만, 미신보다는 가면 비유가 더 나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다양한 가면의 양상을 소개합니다. 먼저 '착하니즘 가면'이 있습니다.
겉과 속이 같다면 스스로 고갈될 이유도 없다. <중략> 겉과 속이 같으면 착하니즘 가면은 필요 없다.
그리고 '괜찮아 가면'도 눈에 띕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한다. <중략> 왜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고 있는지, 가면을 만져 보아야 한다. 왜 무엇을 위해 인내하며 반창고에 의존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본질적인 질문을 찾아야 한다.
감정 과학자로 입문한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감정은 나를 알 수 있는 정보입니다. 그런데 가면을 쓰고 있으면 감정을 볼 기회가 사라집니다.
많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더 해로워 보이는 가면이 동기화 가면인 듯합니다.
상사 또는 나를 평가하는 사람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라고 믿는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착각한다. 상대방도 그렇게 믿고 있고, 심지어 나도 그렇다. 조직에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하지 않고 상사를 위해 일한다.
역경이 이로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개인적 체험으로 유명 개발 블로거 시절에 인터넷 논쟁에 휩싸이면서 동기화 가면에 대한 면역이 생겼습니다. 반면 역할 가면은 저에게도 꽤 영향을 끼친 듯합니다.
대표는 대표다워야 한다. <중략> 사회가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다. <중략> 나 자신 말고 '나의 역할다워야' 한다. <중략> 나는 없고 역할만 남는다.
하지만, 고맙게도 육아가 중력이 되어 저를 자신으로 살도록 지지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자신 있게 자신으로 사는 모습을 배울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면 비유가 <부자 아빠...>의 미신 비유보다 실용적이라 느낀 이유는 바로 '가면의 양면성'을 다룬 부분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가면의 안쪽이다. <중략> 가면의 표피가 아니라 내면화되는 과정을 거쳐 나와 하나가 된다.
가면의 진정한 무서움은 바로 내면화인 듯합니다.
그 대신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를 위해, 그래서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하는 당위성 때문이다. <중략> 위 스키마는 가면이 나의 일부를 파고들어 내가 사라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중략> 가면은... 나 자신으로 인지되고 나를 소멸시킨다.
다음 다발말은 가면이 내면화되는 근거를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생명이 기계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본래 모습과 세상의 작동 원리 사이의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가면은 더 두터워져야만 하고, 나 스스로도 가면이 거추장스럽지 않고 오히려 하나가 됨으로써 편안함을 누리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요즘 배운 표현으로 '환각계'가 떠오릅니다.
삶을 통해 오랜 시간 머릿속에 주입되고 스스로도 다짐해 온 것들에 익숙해지면, 스스로 믿게 되는 단계에 도달한다. 그 과정이 우리 내면의 본래 모습을 기어이 바꾸게 된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통해 경험하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제정신이라는 착각>을 읽으면서 뇌의 작동과 생산성을 강요하는 사회가 만나면 충분히 가스라이팅 될 수 있다는 취약성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근자에 볼 때마다 반가웠던 unlearn이라는 단어와 이를 설명하는 내용을 또 만납니다.
질문과 답을 반복하며 계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다 보면 처음으로 가면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문득 온다. <중략> 우리는 지금까지 발견의 시간보다 생산에 집중해 왔다. <중략> 우리가 잃어버린 것, 그 첫째는 본래의 나에 대한 '발견'이다.
<대체 뭐가 문제야>라는 인생책은 이제 졸업할 때가 된 느낌을 받습니다. 이 책이 그다음이 되어 줄 듯합니다. 그리고, 발명(창작)이 아니라 발견을 하기 위해 고요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스틸니스> 덕분에 함께 깨닫습니다.
다음 다발말을 아직 제 경험에는 없는 혹은 희미한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
본래의 나를 발견하는 찰나는 매우 실제적이다. 그 후에는 들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1] <한국말 말차림법>에서 제안한 구절에 대한 토박이 말입니다. 왜 다발말인지는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에서 일부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6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61. 판단이 부르는 일반화 본능의 무용함 혹은 해로움
62. 판단을 내리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민의 힘
64. 현상태의 정확한 인지가 자연적 학습을 일어나게 한다
66. 무한한 잠재력과 경이적인 내적 지능을 지닌 자신
68. 지금은 지금뿐이다
69. 시각적 이미지와 감정적 이미지를 통해 동작을 배운다
71. 나에게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